쁘러거티 마을은 물이 자주 넘치는 강변에 자리잡은 탓에 걸핏하면 진창이 되곤 합니다. 
3월말,  바짝 마른 산천을 적셔주는 반가운 봄비가 내렸건만
마을은 온통 진흙창이 되고 쓰레기가 밀려다녀 한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서로서티 학생들은 마을 주민회와 함께 '우리마을 청소 대작전'을 펼쳤습니다.

쓰레기를 깨끗하게 줍고
마을 중심길을 흐르는 생활하수로도 말끔히 훑었습니다.
쓰레기가 물길을 막으면 금방 썩은 내가 진동하거든요.
서로서티 학생들은 '우리 마을은 우리 손으로 깨끗하게 청소하자'는 피켓을 들고
어른들께 호소했습니다.

어른들도 모두 동참해서 땀을 흘리니 마을은 어느새 산뜻한 모습으로 변신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당장 먹고 살 걱정 때문에 아이들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렵습니다. 
아이들 입에 밥이라도 넣어줄 수 있으면 그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기 쉽지요.
서로서티 학교 선생님들이 새 학기를 앞두고 마을을 샅샅이 돌며 부모님들을 만나
설득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주세요. 교육은 우리가 책임질게요. 그냥 보내주기만 하시면 됩니다."

부모님은 미안한 마음에 겸연쩍게 웃습니다.
 
"그래요... 그래야지요... "

키가 큰 열두살 짜리도 1학년, 꼬맹이 다섯살 짜리도 1학년...
그렇게 학교 생활이 시작됩니다.





『2011년 3월, 새학기를 앞두고 '학교보내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선생님들』









 

장학금을 나누는 21번 가족 보셀 씨 댁입니다.

네팔 바그룽에 사는 이 가족의 아버지인 단 바하두르 보셀 씨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2007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주변 친척에게 돈을 얻어 사우디아라비아에 갈 비용을 마련했는데
그걸 다 갚지도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셨네요.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요?
글쎄요...가족들에게 전해진 소식은 그저 사망한 채 방에 누워 있는 것을
누군가 발견했더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은 본국에 있을 때는 경험해 보지 못한
강도높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니 그것을 몸이 견디지 못해 급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주노동의 슬픈 단면입니다.

그렇게 가장이 떠나가시고
지금은 여섯 식구가 남았습니다.
어머니와 큰딸 바툴리, 둘째딸 서로서티, 셋째딸 니루, 넷째인 아들 아데스, 다섯째인 아들 소데스...

큰딸인 바툴리는 작년에 결혼해서 집을 떠났습니다.
몸이 아픈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두고 떠나느라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둘째딸인 서로서티가 벌어오는 돈으로 온 식구가 먹고 삽니다.
둘째는 학교 문턱에도 안 갔다네요.
둘째 이름인 서로서티는 힌두교 지혜의 여신 이름인데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학교는 죽어라 싫어 한답니다.
서로서티는 건설현장에서 일당 일을 합니다.
아침 6시부터 저녁 5시까지 꼬박 일하고 나면 200루피를 번대요.
학교가 쉬는 토요일이면 열일곱살인 니루도 언니를 따라 나섭니다.
둘이 같이 돌도 옮기고, 모래도 곱게 치고, 시멘트 반죽해서 접시에 담아 날라 돈을 법니다.
그 돈으로 동생들 밥 먹이고 학교보냅니다.
서로서티와 니루 손은 마디가 굵고 시멘트 벽돌처럼 거칠어졌습니다.

어머니인 코필라 씨는 어려서부터 힘겨운 노동에 시달린 탓에 건강이 무척 안 좋습니다.
어린 딸들이 벌어오는 돈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너무도 한스럽지만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집이 바로 길가에 붙어 있는 덕분에 작은 구멍가게를 차렸는데
워낙 가진 돈이 없으니 물건을 많이 들여놓을 수도 없거니와
라면이니 과자니 하는 것들은 배고픈 아이들이 다 집어먹어 남아나질 않습니다.

2010년, 보셀 씨 가족에게 보내드린 돈은 매달 1,000루피(약 17,000원) 입니다.

2011년 3월, 우리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가족이 수입을 좀 더 높일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다가
텅텅 비어있는 가게를 물건으로 채워드리고
그 물건을 팔아 생기는 수입으로 생활하며 매일매일 적은 돈이라도 저축하도록 하면 어떨까...
가족들은 그 제안을 기뻐하며 받아들이고 열심히 장사해 보겠다고 합니다.
매일 저축 목표액은 100루피(1,700원) 입니다.

3월 23일, 20,000루피(340,000원)를 지원하여 가게에 물건을 들였습니다.
본래 계획은 한번에 30,000루피 어치 물건을 지원하는 것이었지만
가족들이 요청하여 2차례로 나누어 드리게 된 것입니다.
나머지 10,000루피는 장사를 좀 더 해 보고 나중에 필요하면 받겠답니다. 

AHRCDF 바그룽 지부 회원들은
물건을 사다 진열하는 것을 돕고
인근 관공서에 소소한 물품을 살 때는 보셀 씨 가게를 이용해 달라고 요청해 두기도 했습니다.

어린 아데스와 소데스도 먹고싶은 유혹을 견디고 참겠다고 약속합니다. 
새로운 희망이 생기니 오랜만에 웃음꽃이 함박 피어납니다. 

서로서티와 니루는 여전히 공사현장에 어린 몸을 던지고 있지만,
한국에 엄청난 빽이 생겼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씨~익 물립니다. 




           텅 빈 보셀 씨네 가게, 벽에는 아버지 사진이 붙어있네... (2010년 12월)




         AHRCDF 바그룽 지부 회원들과 보셀 씨네 4남매... (2010년 12월)


         의젓하게 가게를 지키는 아데스와 소데스... (2011년 3월)

 

 


  1. 일곱살 지우 2011.03.26 14:58

    아데스형 소데스형에게
    나는 7살인데
    태초마을 지우 아니고 덕유마을 사는 지우야.
    과자 주면 돈을 꼭 받아야 돼. 그 돈 엄마 줘야돼.
    과자 너무 먹고싶겠다.
    건강하게 잘 지내.

 




2010년 1~12월 네팔사티 장학사업 장학금지급내역

네팔에는 유급과 월반제도가 있고 공립학교에서 사립학교로 전학 과정에서 학년이 낮춰
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작년 3월에 보고드린 내용보다 더 학년이 낮아지거나 같은
학년인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후원하시고 마음을 보태주신 모든 분께 온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가족

장학생 번호+이름

성별

학년

연간지원액(루피)

지원사유/사망 및 재해원인/지역

1

1

얼쩌나

6

2,000x12=24,000

아버지 사망, 오토바이사고/한국
보상금으로 주택건축하여 임대수입이 있으므로지원종료예정

2

비쌀

2

2

3

비벡

취업

2,000x12=24,000

아버지 사망, 자살/약물중독/한국
가족이 운영하고 있는 가게가 자리를 잡았고
비벡이 취업하여 수입이 충분하므로
지원종료예정

4

수니따

12

3

5

덤머

8/8

1,000x12=12,000

아버지 사망, 병사/심장마비/말레이시아 

6

란자나

6/6

7

러빈

2/2

4

8

딥띠

대학과정

1,500x12=18,000

아버지 사망, 복통급사/한국 

9

딥칼라

12

10

뎁시카

11

5

11

11

1,500x12=18,000

아버지 사망, 수면중 심장마비/바레인 

12

라즈

8

13

머머따

5

6

14

로스한

3

500x12=6,000

아버지 사망, 심장마비/이집트
운영 중인 가게가 자리를 잡아 수입이 안정된
상태이므로 지원종료예정

15

로사니

유치원

7

16

로사니

4

500x12=6,000

아버지 사망, 심장마비/사우디아라비아
가족수입향상 위해 염소1마리지원 진행중

17

수스마

2

8

18

헤만

2

500x12=6,000

아버지 사망, 교통사고/말레이시아
가족수입향상 위해 염소1마리지원 진행중

9

19

샨다

3

500x12=6,000

아버지 장애, 교통사고-왼쪽눈실명,
거동불가/말레이시아

10

20

린쿠

2 

500x12=6,000

아버지 사망, 자살/말레이시아
가족, 생활보고약속 안지켜 지원종료예정

11

21

삼자나

2

400x9=3,600

아버지 사망, 심장마비/사우디아라비아
엄마 말레이시아에 가사도우미로 취업하여 2010년 8월로 지원종료예정

 

수닐

유아 

12

22

티나

10

800x12=9,600

아버지 사망, 수면중 심장마비/사우디아라비아

23

미나

7

13

24

수전

대학과정

1,200x12=14,400

아버지 사망, 교통사고/말레이시아 

25

라전

12

26

비스누

8

14

27

수실

1

500x12=6,000

아버지 사망, 원인불명 사망 2개월후 발견
/ 카타르
가족수입향상 위해 염소3마리지원 진행중

 

수스마

유치원

15

28

툴라싸

12

1,100x12=13,200

아버지 사망, 자살/사우디아라비아 

29

산타

11

30

비스마

10

16

31

7

900x12=10,800

아버지 사망, 심장마비/사우디아라비아 

32

우뻰드러

5

33

라즈

2

17

34

바버나

6

900x12=10,800

아버지 사망, 심장마비/사우디아라비아 

35

라차나

4

36

하스타

3

18

37

쿠살

4

900x12=10,800

아버지 사망, 심장마비/말레이시아 

38

시탈라

2

39

카비타

유치원

19

40 

누지나 

여 

1

600x12=7,200  

아버지 사망, 원인불명사망/사우디아라비아

20

41

사자나

유치원

400x12=4,800

아버지 사망, 심장마비/카타르

21

42

니루

7

1,000x12=12,000

아버지 사망, 원인불명사망/사우디아라비아
가족수입향상 위해 운영중인 가게에 판매물품지원, 납품처 확보 노력중

43

아데스

6

44

소데스

4

22

45

아데스

1

(500x6)

+(1,000x6)=9,000

아버지 사망, 자살/말레이시아
안키타 취학하여 7월부터 1,000으로 인상

 

안키타

유치원

23

46

스리자나

11

1,000x12=12,000

아버지 사망, 심장마비/사우디아라비아

47

사파나

7

24

48

사쿤탈라

8

1,200x12=14,400

아버지 사망, 오토바이사고/인도

49

6

50

우펜드러

4

25

51

선딥

남 

10

900x6=5,400

아버지 사망, 심장마비/말레이시아
2010년 7월부터 월 900 지원

52

닐루

9

53

뿌자

9

합계

270,200

송금수수료 및 전화요금
(네팔국내 발생비용)

10,750

총 합계

280,950루피

(약 480만원)



 

지난 해 여름 비바람에 지붕을 홀딱 날렸던 우리 서로서티 학교가
아주 이쁜 모습으로 단장을 했습니다.

새 양철지붕을 해서 올렸으니
이제 당분간은 비가 와도 샐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요,

공사를 하는 김에 벽을 더 높게 올려서
키 큰 사람이 교실에 들어와도 머리가 닿을까 숙이지 않아도 좋아요.



이렇게 학교를 고치고 다듬는데 큰 마음을 보태주신
'네팔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선생님들만 남아 뒷정리를 하고 있네요~



      교실에서 양철 천장을 찍어 봤어요. 가운데 밝게 보이는 부분은 채광창입니다.
          전기를 사용할 수 없으니 교실이 많이 어둡거든요.
          양철을 조금 잘라내고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막았답니다.





      새로 단장한 교실에서 시험을 보고 있는 서로서티 친구들.
          시험 감독을 얼마나 엄격하게 하는지 몰라요.
          한 줄은 4학년 한 줄은 6학년 이렇게 섞어 앉았으니,
          슬쩍 눈을 돌려 친구 답안을 보고 싶어도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거~~!!


         네팔은 이제 더운 여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건기여서 식수와 생활용수가 모두 부족합니다.
         4월부터는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고 또 5월부터 8월까지 이어지는 우기에는 정말 많은 비가 쏟아지지요. 
         만만치 않은 자연환경입니다만, 
         우리 서로서티 친구들이 학교에서 생활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도록 
         많은 분들이 마음을 모아주고 계시니 아주 든든합니다. 


         여러분께 아이들의 맑은 인사를 전합니다..... 나마스떼~~~~

   



연합뉴스 
<숨진 이주노동자 자녀 장학사업 4년째 펼쳐>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네팔장학사업' 진행


(서울=연합뉴스) 구정모 기자 = 네팔 카트만두에 사는 얼쩌나(14)양과 비쌀(12)군은 아버지의 돌연한 죽음의 충격에서 벗어나 학교를 잘 다니고 있다.

지난해엔 아버지의 사고 보상금으로 지은 집에서 나오는 월세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이들 남매의 아버지 찬드라 라이(사고 당시 36)씨는 2005년 8월 경기도 양주시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귀가하던 중 도로에 쌓여 있는 철제 빔에 부딪혀 목숨을 잃었다. 사고 현장은 새 도로를 건설하던 곳이었지만 아무런 출입 통제 표지판도 설치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농사로 먹고 살기 어려워 수도인 카트만두로 왔다가 다시 돈을 벌고자 2001년 한국으로 이주노동한 라이씨의 '코리안 드림'은 4년 만에 물거품이 됐다.



문제는 유가족이었다. 가정 살림을 남편의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아내 엄비까(34)씨는 남편의 사고 소식에 망연자실했다.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인 아시아인권문화연대(이하 아시아연대)는 라이씨의 사고 소식을 접하고서 장례부터 사고 관련 소송에 이르기까지 유가족을 도왔다.

이 단체의 이란주 대표는 그러나 사고 수습 과정에서 가족을 만나고 돌아오는 발길이 무겁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죽음을 아직 실감하지 못한 남매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다.

이 대표는 "엄마는 어쩔 줄 몰라 울고 있는데, 아이들은 우리가 준비해간 선물에 마냥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먹먹했다"며 "이 아이들을 장기적으로 도울 길을 그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아시아연대는 이후 2006년 7월부터 10월까지 한국에서 사망한 외국인 노동자의 가족들이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삶을 엮은 '보고서: 꿈 그리고 악몽'을 발간한 뒤 본격적으로 사망 외국인노동자의 자녀 장학사업에 나섰다.

처음엔 한국에서 일하다 숨진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들을 돕다가 나중에 한국 이외의 나라에서 이주노동하다 숨진 노동자의 가족들까지 지원 대상을 확대했다.

본국에 돌아간 네팔 출신 외국인노동자들이 아시아인권문화개발포럼(AHRCDF)을 만들어 아시아연대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데, 이들이 한국보다 중동과 같은 지역에서 숨진 노동자들의 유가족들이 더 열악한 삶을 살고 있다고 알려와서다.

현재는 네팔 각 지역에 퍼진 AHRCDF 지역모임 회원들이 라이씨 가족처럼 딱한 사정이 있는 가족들의 사연을 카트만두 AHRCDF 사무소에 연락해오면, AHRCDF가 현지 실사 후 아시아연대와 논의해 지원여부를 결정한다.

지원 대상으로 결정되면 유가족 자녀는 사고 당시 재학 중인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도록 학비를 받는다.

아시아연대는 대학 학비까지 지원하는데, 대학 등록금은 전액이 아니고 유가족의 생활형편에 따라 부분 지원하고 있다.

아시아연대는 지난해 말 현재 25가정 52명에게 모두 27만7천350루피(한화 470만원)를 장학금 명목으로 지원했다.

장학금은 온라인 사이트 해피빈(happylog.naver.com/asiansori.do)와 오프라인을 통해 후원금을 받아 마련하고 있다.

이란주 대표는 "숨진 외국인노동자의 자녀를 돕는 것은 이주로 인해 발생한 문제와 그에 따른 아픔을 같이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며 "이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있지만 큰 금액이 아니어서 좀 더 지원금을 늘릴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2011/03/15   연합/구정모 기자 pseudojm@yna.co.kr





한국일보

<"한국인들 도움의 손길에 희망 생겼어요">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숨진 이주노동자 가족들 생계비 지원

"애들 아빠를 잃고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했는데 한국인들의 도움으로 희망이 생겼어요."

네팔 카트만두에 사는 엄비까(34)씨는 몇 해전 남편을 잃었다. 남편 찬드라 라이(사고 당시 36세)씨는 2001년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건너왔다. 네팔에 두고 온 가족에게 돌아갈 날만을 손꼽으며 밤낮없이 일했지만 2005년 8월 경기 양주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귀가하던 중 막다른 도로에 쌓여 있는 철제 구조물을 받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사고 현장은 새 도로를 건설 중이었지만 아무런 출입통제 표지판도 설치돼 있지 않았다.

가족들은 비행기삯이 없어 한국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엄비까씨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남편이 벌어오는 수입에 전적으로 의지해왔던 터라 당장 먹고 사는 게 막막했다. 라이씨 가족의 딱한 소식을 접한 아시아인권문화연대는 장례부터 도로 공사를 했던 업체를 상대로 한 소송까지 도맡았다.

"소송에 필요한 위임장 때문에 직접 네팔로 찾아갔다"는 이 단체 이란주 대표는 "아빠가 죽은 줄도 모르고, 멀리서 온 손님이라며 마냥 반가워하기만 하던 어린 두 남매를 보면서 지원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 가족이 한달 동안 먹고 입고 학교를 다니는데 필요한 생활비는 2,500루피, 한화로는 4만5,000원이면 됩니다. 한국선 가족 외식 한번 참으면 되는 돈이죠." 이 단체의 도움으로 라이씨의 두 남매는 다행히 학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시아인권문화연대는 라이씨 가족을 시작으로 한국에서 일하다 숨진 외국인 노동자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장학사업에 착수했다. 최근에는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사망한 제3세계 이주노동자 자녀에게까지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2006년 사우디아라비아로 일을 하러 간 남편을 잃은 네팔의 부마다르지씨도 이 단체로부터 최근 지원을 받고 염소 5마리를 구입해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지금까지 네팔에서 지원을 받은 이주노동자 가족은 25가정 52명으로 27만7,350루피의 장학금이 지급됐다. 우리 돈으로 치면 470만원에 불과하지만 이들에게는 생명줄이다.

이 대표는 "사고나 과중한 업무로 인한 심장마비 때문에 사망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늘고 있다"며 "당장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이들의 가족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011-03-15   한국일보/강윤주기자 kkang@hk.co.kr
 






<더 나은 네팔 꿈꾸는 함로오토모바일센터>
  아시아인권문화연대, 현지서 사회적 기업 설립

(서울=연합뉴스) 구정모 기자 = 국내 이주노동자 지원단체가 이주노동의 악순환을 끊고자 해당 국가에서 사회적 기업을 운영, 일자리 만들기에 나서고 있다.

   경기도 부천시에 기반을 둔 아시아인권문화연대가 네팔 카트만두에 올 3월에 설립한 '함로오토모바일센터'는 현지 청년들에게 오토바이 수리 기술을 가르치는 한편 수리와 세차업을 운영하고 있다.

   국내 이주노동자 지원단체가 네팔까지 진출한 것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내에서 체류를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가도 또 이주노동을 떠나야 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주노동을 통해 번 돈은 대개 본국의 가족 생활비로 소진된다. 즉, 그 노동자가 일을 마치고 가족에게 돌아갔을 때 모아 둔 돈이 없어 생활기반이 없다는 뜻이다.

   본국엔 마땅한 일자리가 없고 설령 직장을 구하더라도 이주 노동하던 나라에서 받았던 월급에 못 미쳐 결국 가족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시 타국살이를 하러 떠나게 된다.

   아시아인권문화연대는 이 같은 악순환을 끊고자 네팔에 청년들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방법을 고민했다.

   처음 시작한 것은 오토바이 수리기술 교육이었다. 네팔의 주된 교통수단은 오토바이인데, 오토바이는 대개 수입 판매되는 신형이어서 정비기술자가 많지 않다는 것에 주목한 것.

   아무 기술없이 정비소에 취업하면 한달에 약 2천루피(한화 약 3만2천원)를 받는데, 정비기술이 있으면 4천루피 정도를 받을 수 있었다.

   아시아인권문화연대는 이론 교육실, 실습실 등 두 칸짜리로 이뤄진 공간을 임대해 지난 2008년 7월 정비교육센터의 문을 열었다.

   아시아인권문화연대와 인연을 맺은 네팔 노동자들이 본국에 돌아가서도 이 단체와 연을 이어가며 AHRCDF(아시아인권문화개발포럼)를 조직해 정비교육센터 설립에 힘을 보탰다.

   이론과 실습교육은 이곳의 기술대학 (TITI, Technical Instructors Training Institute) 버드리 교수가 담당했다. 교육과정은 4개월이었다.

   주로 현지의 20~25세 청년들이 수업을 들으러 왔다. 하지만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이 태반이어서 교육기간 숙식을 해결하기 어렵고, 또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 할 처지이기에 과정을 다 수료하지 못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이가 적지 않았다. 아시아인권문화연대는 좀 더 나은 교육을 하면서도 수익을 창출해 자립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꿈꿨다. 그 해결책이 사회적 기업이었다.

   그래서 140여평을 임대해 방 5개짜리 벽돌건물을 지었다. 오토바이 수리용 리프트 2대와 세차용 리프트 1대도 들였다. 수리와 교육을 담당할 기술자들도 고용했다.

   이렇게 해서 현재 '함로오토모바일센터'가 문을 열게 됐다. '함로'는 네팔어로 '우리'란 뜻이다.

   지난 2008년 정비센터 시절부터 이곳을 수료한 네팔 청년이 50여명에 달한다. 아시아인권문화연대는 이곳에서 배운 청년들이 자신의 고향에 내려가 정비센터를 차리고 또 무료로 정비기술을 가르쳐 더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대표는 "오토모바일센터를 통해 '이주노동이 살 길'이란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어 네팔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며 "이들이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을 키울 수 있다면 네팔이 좀 더 나은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사진설명: 아시아인권문화연대가 네팔에서 설립할 사회적 기업 '함로오토모바일센터'에서 네팔 기술대학 버드리 교수가 현지 청년들에게 오토바이 정비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사진제공>
pseudojm@yna.co.kr
(끝) 2010-12-13
  1. 여기동 2011.06.11 22:08

    함로 친구들 화이팅 입니다

  2. 아연대 2011.06.11 22:10 신고

    여기동 선생님도 화이팅입니다. 네팔 잘 다녀오시기를.... 몸건강 마음건강 기원합니당~


고팔 크리슈나 시와코티(Gopal Krishna Siwakoti)

이 글은 네팔의 정치적 격동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으로, 네팔에서의 민주주의 발전 과정, 시민사회의 참여 및 네팔의 정치적 구조 변화의 역학과 관련되는 문제들을 다룬다.

10년에 걸친 폭력 투쟁을 경험한 히말라야의 이 신생 공화국은 투쟁 후 발생한 조직범죄들과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분파 무장단체들과 함께 고밀도의 급속한 정치적 전환을 겪어왔다. 네팔의 과도기 현상은 평화로운 민중봉기를 통해 급진적인 정치적 변화를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독특한 사례 연구로 제시될 수 있다. 그 밖에도 이 글은 자생력 있는 과도 사법체계가 부재한 가운데 과거를 정면으로 다루는 데 실패한 결과도 다룬다.



네팔 근현대사 개관

네팔과 관련해서는 모순 아닌 것이 없다! 네팔은 바다가 없는 소국으로서 놀라운 지형적 다양성을 가진 나라이다. 네팔은 세계 최고봉을 자랑하는 산이 있는가 하면 아열대 호랑이 밀림이 펼쳐져 있는 남쪽 국경지대를 따라서는 고도가 해수면 수준으로 뚝 떨어지기도 한다.

모두 147킬로미터의 거리 내에서 일어나는 고도 변화이다. 이 나라는 아시아의 두 강대국, 중국과 인도 사이에 끼어 있다. UN과 국제사회가 네팔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있으나, 실은 정치적․경제적 영역에서 두 대국의 명시적 승인 없이 외부 세계와 접촉하려면 운신이 힘든 처지에 직면할 대가 종종 있다. 사실 알고 보면, 네팔은 어느 방향에서나 독립성을 협상으로 확보해야 하는 형편이다.

네팔의 어두운 봉건적 과거는 새 천년의 활기찬 정신과 충돌한다. 이 나라는 전통적으로 소수민족의 소외와 성차별 그리고 자유와 열린사회를 논할 여지가 없는 절대통치를 지지하는 케케묵은 카스트 제도 안에서 탄생했고, 지금도 그 때문에 파행을 면치 못하고 있다.

네팔은 2백40년간 우여곡절을 겪으며 가까스로 왕위를 유지해온 전제군주 국가였다. 그러나 폭력적인 마오이스트
Maoist 반란이 2006년의 평화적인 민중봉기와 혼합되어 왕정을 거의 다 무너뜨렸다. 네팔인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으로 비쳐지기는 하나, 10년 내전과 혹독한 정치적 체제 변화에 시달려왔다.

1743년 이전의 네팔에는 인구가 적은 부족국가들이 무수히 존재했다. 사회구조는 비교적 단순했고, 직업과 지위의 구분은 대체로 연령, 성별 그리고 군사적 능력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점차 인도-아리안 공동체들, 특히 오늘날의 인도 북부 출신 공동체들이 네팔의 구릉지대로 들어와 카스트 제도에 기반한 복잡한 사회적 분업 체계를 도입했다. 17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소국들이 힌두 왕들의 확고한 통제하에 들어가 있었다(Rose and Fisher, 1970, Bista, 1991).

18세기 중엽 고르카Gorkha라는 산악국의 야심 많은 왕 프리트비 나라얀 샤Prithvi Narayan Shah와 그의 계승자들이 고르카 왕국의 영역을 확장하여 오늘날 네팔이 창건하는 토대를 마련해놓았다. 넓은 지역을 병합하고 정치적으로 통제한 결과 토지세를 더욱 더 많이 징수할 수 있었으며 이는 이웃국가들을 침공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소국들을 통일한 이후 토지세 수입은 네팔 지배 계급의 주된 수입원이었다(Regmi, 1978).

1846년에 장가 바하두르 라나Janga Bahadur Rana가 네팔의 총리가 되었고, 그가 점차 권력을 장악하여 왕을 허수아비에 불과한 존재로 만들었다. 라나 정권은 외적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밀접한 관계를 발전시켰다. 영국령 인도에 대한 라나 정권의 정책은 화해와 생존 정책이었다.

라나 일족은 네팔인들을 영국군의 병력 자원으로 공급하는 데 동의했다. 그 대가로 영국은 그들에 대한 정치적 지지와 네팔 내정에 대한 불간섭을 보장했다
(Stiller, 1975). 라나 일족은 백 년 넘게 나라를 통치하면서 고도로 억압적인 국가 관료조직을 창설했고, 이 조직은 다른 사회집단들의 이해관계를 억압했다(Rose and Fisher, 1970).

1950년대에는 라나 체제에 대한 민중의 반대가 꾸준히 힘을 키웠고, 여러 정당과 정치조직이 창설되었다. 근대적 제도의 형태를 띤 관료조직과 더불어 다양한 정당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 구조와 계급 관계는 어떤 근본적 변화도 겪지 않았다(Blaikie et al, 1980). 판데이Panday(1999: 239)가 지적하듯이, 이 기간은 새로운 정치제도들이 미래의 방향을 제시할 뚜렷한 전략을 전혀 제공해주지 못한 채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 있었고, 결국 네팔의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1960년에 왕은 집권당 네팔국민회의Nepal Congress(NC)가 권한 남용과 부패를 저질렀고 무엇보다도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난하면서, 모든 정당을 금지하고 무정당의 판차야트Panchayat 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Rose and Fisher, 1970; Burghat, 1994).

무정당의 판차야트 정치제도의 도입으로 왕은 고위 카스트 계급과 지주 계급을 하수인들로 삼아 민간 행정조직, 군부, 의회와 사법부를 통제할 자신감을 얻었다. 이러한 정치 환경에서 네팔 국민들은 발언권을 상실했고, 1950년대의 민주주의로 확립된 국민들의 권리는 왕에 의해 폐지되었다.

이런 환경에 환멸을 느낀 대중 사이에서 소요가 점증했다. 그들은 판차야트 제도가 권력을 남용하고 있으며, 30년에 걸친 계획적인 개발과 외국 원조의 유입에도 불구하고 빈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Panday, 1999). 더욱이 이 제도하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거부되었고, 정치적 반대자들은 잔인한 취급을 받고 재판 없이 구금되기까지 했다.

억압적인 체제에 도전하기

단일한 중앙집권적 네팔국을 만드는 과정은 2백42년 전에 통일과 민족 형성이라는 이름하에 시작되었다. 네팔인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억압적인 국가 형태에 몇 차례 도전했다. 1990년에는 불법화된 네팔국민회의와 몇 개 공산당들이 합세하여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한동안 민간 소요를 거친 뒤 왕은 무정당의 판차야트 제도를 해체하는 데 동의했지만, 입헌군주의 지위는 유지했다. 다당제에 기초한 민주주의 회복에 이어 몇 개의 조직과 정당들이 등장했다. 여기에 더해 관료조직과 국가기구의 변화도 이루어졌다. 외국 원조와 민간 부문의 성장도 단기간에 상당히 증가했다. 개발 부문에서 국내 NGO들의 활동을 권장한 정부 정책은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NGO들은 1990년대 초기에 네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Seddon, 1994).

이 같은 많은 긍정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네팔은 다당제 정치제도를 회복한 지 10년이 지나서도 정치 안정을 경험하지 못했다. “우리는 정치적 단층선이 확장되면서 정치체계 전면facade이 네팔의 권위주의 통치와 전통적․위계질서적․반봉건적 사회구조의 역사가 지닌 무게에 짓눌려 무너질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판데이Panday(1999)는 설명한다.

민주주의가 회복되자 선출된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커졌다. 그러나 정당들이 반목과 분열에 빠져 민주적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러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뿐만 아니라 이 기간에는 부패 사건들이 급증하여 가치와 지도력의 위기가 심화된 것이 특징이다
(Seddon, 1994).

과거에 네팔의 통치체제에서 정치적 배제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헌법에 따라 치러진 선거 과정에서 투표의 60퍼센트 이상이 정부 형성 과정으로부터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1991년 헌법에는 중앙에서 지방으로, 다시 기층민중 수준까지 권력을 위임하는 규정이 없었다. 그것은 국가 예산의 40퍼센트만 중앙정부 밖으로 배분된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네팔은 의회가 12년 동안 세 번 선출되고 네 번 해산되는 특이한 상황을 겪었다.

이것은 통치가 지배 엘리트들의 자의에 심하게 휘둘리며, 그래서 국민 대표성이 매우 낮고 권력이 중앙집중화된 정치제체의 총리가 의회를 마음대로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과거에는 인구의 41퍼센트가 의회 의석의 84.9퍼센트를 차지하고, 인구의 58퍼센트는 불과 15퍼센트의 의석만 차지했다. 이 수치들은 당시의 정치 제도가 구조적으로 결함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법부가 더 강했더라면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회가 해산되고 그에 대해 법원에 소가 제기될 때마다 법원이 이전의 판결과 배치되는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에서 사법부가 약했다는 것이 잘 드러난다.

민주주의의 결핍을 경험한 일부 다른 나라에서는 정부가 개선 조치를 취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네팔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구조 자체가 결함이 있었고 부패, 정실주의 그리고 의회에서의 ‘뒷거래’가 성행했기 때문에, 그러한 환경에서 국민들이 점차 정당과 그 지도자들에 대해 믿음을 상실하게 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민주적 가치와 인권보장의 문화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점진적 접근방법을 넘어서는 체제의 대대적인 개혁이 불가피했다.

싸우기 위해 총을 들다

민주주의를 회복한 지 6년이 지난 1996년 2월 13일, 네팔 공산당(마오이스트, CPN(M))은 중서부 산악 오지에서 ‘인민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무장반란을 개시했다.

그들의 목표는 봉건제도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를 확립하여 새로운 민주국가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네팔인민전쟁은 그 레토릭에도 불구하고 계급전쟁은 아니었으며, 모잠비크의 경우와는 반대로 주민들을 구래의 종족 구분을 토대로 양극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젊은이들을 개별적으로 동원하여 그들에게 직업을 제공했는데, 이것은 여러 면에서 국외로 돈을 벌러 나가는 것에 대한
(떳떳한) 대안이었다. 빈곤에다 허약한 정부, 독재적 지배에서 민주적 지배로 실질적인 이행을 하지 못한 것, 그리고 카스트와 민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부재는 일정 기간 불안정을 가져왔고, 그것은 시간이 가면서 마오이스트 반군이 발호할 토양을 제공했다.

반란이 시작되었을 때는 그 심각성을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다. 반란은 급속히 확산되어 나라를 국가적 위기로 몰아넣었고, 당장은 끝이 보이지 않는 오랜 내전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이 전쟁이 국가나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마오이스트들은 좌절하고 실망한 젊은이들과 차별받는 빈곤층을 반란에 끌어들이는 데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투쟁으로 더 나은, 더 평등한 사회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던 사람들은 곧 실망하게 되었다. 결국 이 나라는 불법 감금, 고문, 강요, 유괴, 실종, 초사법적 살해의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졌고, 이미 만연된 가난과 불행에 의해 그것이 더 심화되었다.

그러는 동안 당시의 왕인 갸넨드라가 권력을 장악하여 2005년에 독재적 통치를 실시하면서, 마오이스트들의 이른바 ‘테러 행위’를 막는다는 미명하에 정당과 시민 사회조직들의 활동을 사실상 금지했다. 내전의 완충세력이었던 인권단체들도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시간이 가면서 반란은 격화되고 통제 불능이 되어 어느 쪽도 승리할 가능성이 없었다. 마오이스트들은 농촌 지역의 거의 80퍼센트를 장악했다고 주장하였고, 국가 행정 및 보안
(군대와 경찰) 조직 기능은 도시 지역과 지역 사령부 및 농천 지역의 일부 보안 기지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 나라에 두 개의 정부가 존재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농촌 지역은 국가의 행정, 사법 및 보안 조직 없이 마오이스트들의 통치를 받는 한편, 그보다는 낮은 수준의 국가 통치라는 이중 통치를 받았다.

내전은 네팔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인권침해가 만연하여 초사법적 살해, 신체 훼손, 협박, 모욕, 사회적 고립, 성별에 기반한 폭력gender-based violence, 유괴 및 아동들의 강제 징집이 여기저기서 발생했다. 이 내전으로 1만5천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평화재건부 자료).

이 분쟁으로 인해 수많은 가족과 개인들이 집을 버리고 탈출하여 비교적 안전한 지역 사령부가 있는 곳이나 안전한 도시 지역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 추산으로 약 1만 8천 명이 피난을 갔다고 하나, 노르웨이 난민평의회
Norwegian Refugee Council의 추산으로는 이 수치가 10만에서 20만 사이에 이른다. 카리타스 네팔Caritas Nepal에서는 피난민 숫자를 21만 4천 명에서 27만 2천 명 사이로 추산했다.

보호를 위한 비폭력 무기

2006년 4월 왕으로 하여금 직접 통치를 포기하게 만든 대중 운동의 성공에 이어 몇 달 동안 협상이 느리게 진행된 후, 당시의 7개 정당연합Seven Parties Alliance(SPA)과 마오이스트들은 2006년 11월에 역사적인 포괄적 평화협정Comprehensive Peace Agreement(CPA)에 서명함으로써 10년을 끌어온 내전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협정은 2005년 뉴델리에서 SPA와 마오이스트들 사이에 이루어진 양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양측의 내재된 관점과 이해관계의 영구적인 변화보다는 이해관계의 일시적 수렴을 대변한다. SPA와 마오이스트들은 네팔의 장래 제도들에 대해 관점이 서로 달랐고, 개별 정당들의 선거 이해관계가 점차 전면에 부상했다. 포괄적 평화협정 그 자체가 네팔 정치의 배제적 특징들을 변화시키거나 긴급히 요구되는 경제발전과 안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이 협정은 과도 의회와 정부의 구성 및 제헌의회(CA) 선거를 위한 길을 닦았다. 무기 관리에 관한 세부 협정에서는 마오이스트들이 자기편 전사들을 숙영지에 따로 입소시키고 그들의 무기를 UN 감독하에 폐쇄 보관하기로 약속했다. 네팔군은 대체로 병영에만 머무르기로 했다.

오랜 숙원이던 제헌의회 선거는 결국 2008년 4월 10일에 치러졌는데, 단순다수대표제와 비례대표제를 혼합한 방식의 선거제도를 채택했다. 2008년 5월 마오이스트들이 이끄는 새 의회가 2백 40년 된 구군주제를 폐지하기로 결정하자, 세속국가이던 세계의 마지막 힌두 왕국은 공화국으로 선포되었다.

불행히도 제헌의회는 아직 의미 있는 결과를 산출하지 못하고 있다. 2008년 4월 구성된 이후로 제헌의회가 안고 있는 특징적인 문제들은 무엇보다 견실한 대화 매커니즘의 부재, 부실한 업무 실행, 신뢰 구축에 대한 관심 부족 그리고 불투명하고 엘리트 주도적인 접근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숙영지에 머무르고 있는 반군 전사들의 통합, 국가의 연방구조 결정, 인권 기준의 설정, 정부 형태의 결정, 선거에서의 대표성 부여 방식, 자결
自決과 자치를 포함한 주요 쟁점들에 관한 타협안의 모색과 관련하여 핵심 정치 주체들 간에 나타난 분열은 계속 다음 단계들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과도 헌법에서 규정한 대로 1010년 5월 28일까지 새 헌법을 공포하기로 한 마감시한을 넘길 것이 거의 확실하다.

네팔 정당들의 활동은 의심, 정파적 이해, 선거구민들에 대한 신뢰 부족, 특히 지도부와 엘리트들에 의한 밀실 의사결정을 특징으로 한다. 당내 의견 수렴이 어렵다는 약점은 대다수 정당들 내의 기강 해이로 인해 더 악화되고 있다. 정치인들이 개별적으로 도발적 발언을 일삼고 개인적인 목표를 공공연히 추구하는 탓이다.

큰 난제는 국가와 정당들이 마데시Madeshi, 여타 다양한 소수 종족집단, 여성, 달리트dalits(불가촉천민) 기타 소외된 집단들의 요구에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 하는 데 있다. 다수의 소외된 집단과 지방 집단들이 등장하여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주류 정치 과정과 새 헌법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마데시들은 네팔 정치의 의사결정 과정에 자신들이 포함되지 않고 있는 데 대한 불만을 토로해 왔고, 토착 부족, 달리트, 장애자들과 기타 전통적으로 소외된 사회계층의 경우도 그와 마찬가지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공화국으로 가는 길

네팔의 제헌의회 선거는 평화 과정peace process으로 한걸음 크게 나아간 것으로, 연방제 민주공화국을 선언하고 헌법 기초起草 과정을 출범시키기 위한 길을 닦았다.

이 선거는 분명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네팔 공산당-마오이스트가 큰 표 차로 제1당으로 부상하여 제헌의회 의석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최대의 기성 정당들인 네팔 국민회의
(NC)와 네팔 공산당-UML(통합 마르크시스트-레니니스트, CPN(UML))은 참패하지는 않았지만 의석 비율이 낮아서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왜냐하면 양당의 의석수를 합쳐도 마오이스트들보다 적기 때문이다. 왕당파 정당들은 단순다수대표제(지역구) 의석을 한 석도 얻지 못하고, 비례대표 의석을 통해 간신히 새 의회에 발만 들여 놓고 있다. 제헌의회 선거는 광범위한 폭력 발생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평화롭게 치러졌다.

선거 이후 7월까지 권력 배분 협상이 몇 달간 계속된 뒤, 네팔 의회는 람 바란 야다브 박사
Dr. Ram Baran Yadav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푸슈파 카말 다할Pushpa Kamal Dahal은 네팔의 초대 마오이스트 총리로 임명되어 2008년 8월에 취임했다. 마오이스트들은 구 정당들이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국민적 열망에 정확히 부응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그들이 구사한 좀 더 수상쩍은 기법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카트만두의 정치놀음에 몰두하지 않고 일반 민중과 친밀히 접촉해 왔다는 사실을 최대한 활용했다. 선거는 너무나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던 네팔 국민들에게 발언권을 행사할 기회를 주었다.

투표 방해와 협박의 사례들이 있기는 했으나 사람들은 대거 투표장에 나와 투표권을 행사했다. 4월 선거에서 마오이스트들은 압도적 다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깨지기 쉬운 평화 과정을 주도하여 잘 마무리하라는 국민적 위임
委任을 새로이 확보한 것이다.

제헌의회의 첫 회의에서는 근 2백 42년 된 군주제를 폐지하기로 만장일치로 의결했고, 네팔은 세속적인 연방제 민주공화국이 되었다. 특히 타라이 지역Tarai region(네팔 남부 마데시의 거주지)의 지역 정당들이 등장한 것도 새로운 정치 지형의 한 면모였다. 이 마데시 정당들은 제헌의회 선거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어 제헌의회 내에서 의미 있는 대표성을 확보했다.

제헌의회는 놀랍도록 포용력 있는 기구이며, 과거의 다른 어떤 의회보다도 네팔의 카스트, 소수민족, 종교 및 지역적 다양성을 더 많이 대표한다. 의원들의 3분의 1이 여성으로 채워지면서, 이 나라는 여성의 대표성에 관한 한 일거에 지역의 지도적 국가가 되었다. 마데시 자나디카르 포럼Madheshi janadhikar Forum(MJF)은 자신들이 마데시들의 불만을 막연히 대변하는 단순한 간판 이상이며, 어쩌면 앞으로도 상당 기간 표를 동원할 수 있고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부각시킬 수 있는 자생력 있는 정치조직임을 입증했다.

적자생존

정치적 배제(특정 집단을 정치 과정에서 배제하기)는 대체로 지난 과거의 문제이다. 더 큰 문제는 지방의 각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정치적 공백인데, 이는 부실한 개발에서 나온 공백이고, 전국 및 지역 수준의 지도부가 아무런 정당성을 얻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공백이다. 격동의 몇 년을 거치면서 마오이스트들은 네팔 선거민주주의의 가장 취약한 고리가 지역 격차, 카스트 격차 그리고 소수민족 격차임을 이해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부문이 반란의 기운이 가장 뜨거운 곳이다. 또한 마오이스트들이 동원하는 인구의 대부분은 어떤 주요 정당도 그들을 수중에 넣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있다. 지난 15년간은 또한 선거만으로는 민주주의와 포용을 이루어내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국가에 의한 불의뿐만 아니라 시장에 의한 불의까지 온갖 형태의 불의를 우리 시민사회가 비판할 필요가 있다.

지난 60년에 걸친 빈약한 몸의 정치body politics 기간 동안 네팔에서는 일시적이나마 독재적 통치를 대신해 입헌 군주제와 다당제 민주주의가 한 번씩 등장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유는 종종 정치적 무정부 상태와 대중적 환멸로 전락하곤 했다. 그것은 정당들과 군주 사이의 끝없는 권력 투쟁 때문이기도 했고, 사회경제적 발전을 계속 등한시한 탓이기도 했다.

1990년에 이루어진 비렌드라 왕과 정당들 간의 타협은 영국식 입헌군주제와 의회민주주의를 공식화하는 데 기여했다. 서양의 자유 애호가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네팔이 마침내 민주국가가 되는 문턱을 넘어선 것이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2005년 2월 1일, 갸넨드라 왕이 자기 아버지가 1960년에 한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그 일련의 사태는 자유 애호가들에게 충격을 주었는데, 특히 이때는 서구 세계가 자유를 해외로 적극 확산시키고 있을 때여서 더 그랬다.

현행 제도들은 근본적으로 배제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네팔이 채택한 다수결주의적 제도들은 다문화 사회에서가 아니라 다수파 사회에서 효과를 발휘한다. 다수결주의적 제도들은 계급 분열을 심화시키며, 네팔에서는 여기에 카스트 힌두의 가치와 혼입되어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효과를 낳는다.

헌법이 일정 집단들의 이해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그 집단의 개인들은 다른 국민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법의 보호를 향유한다. 현재의 정치구조에 대해서는 그것이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전제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부터 다중언어 정책을 부당하게 폐기했으며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는 점에 이르기까지 얼마든지 반대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처럼 현행 제도들이 보장하지 못하는 목표들을 이루기 위한 실용적 모델의 하나가 연방제도라고 믿는다. 그러한 제도는 국가 행위와 지방분권화 간에 올바른 균형을 제공하여, 문화적 자율을 통한 포용을 가능하게 하고 소외된 집단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한편, 전 국민의 이익을 더 잘 반영하는 공공정책을 마련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연방제에서는 민족 갈등에 대한 더 나은 관리, 더 효율적이고 민의에 반응하는 행정, 지역적으로 균형 잡힌 경제발전, 더 발전된 지방분권과 지역 수준의 다양한 실험을 도모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인권: 비인도적 만행들

10년에 걸친 마오이스트 반란과 무자비한 왕실과 군부의 진압 활동으로 1만 5천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의 피난민이 마을을 떠났으며, 이전의 모든 확실성이 뒤집혀버렸다. 이 나라는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려고 여전히 몸부림치고 있지만,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여전히 처벌받지 않고 있다는 것이 현재 네팔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다.

2006년 4월의 봉기는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와 평화의 공간을 창출했지만, 오래전부터 약속된 진실과 화해 위원회와 실종위원회가 구성되지 않고서는 평화 과정을 낙관할 수 없을 것이다. 경찰, 군대 그리고 마오이스트들은 과거에 초사법적 살해, 유괴, 고문과 실종이 일상적으로 저질러질 때, 모두 인권 규범을 위반하였다.

그러나 단 한 명의 피해자나 생존자도 명목적인 사망 위로금 이상의 피해배상이나 법적 구제를 받지 않았다. 정치적 편의의 제단에서 사법절차를 희생시키려는 시도들이 있지만, 그것은 네팔의 통치 체제에 특유한 불처벌
impunity의 문화를 더욱 고착화할 것이다. 군부는 범행자들을 민간 법정에 넘겨주기를 주저하고 있고, 마오이스트로서 잔학행위를 저지른 자들도 체포되지 않고 있다.

중대한 인권침해자들이 영예로운 승리자가 되었다. 그 잔학행위들을 조사하여 진실을 밝히고 궁극적인 화해를 위한 사법적 정의를 통해 평화를 진척시킬 기구들을 만들어야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정의실현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승리자들’은 그 구성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고 있다.

네팔의 끔찍한 인권침해 기록이 그나마 의미가 있다면, 그것이 활기찬 시민사회로 하여금 모든 학대행위에 대한 면밀한 감시를 계속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지금은 ‘인권수호자
Human Rights Defender’라는 흰 글귀가 쓰인 푸른 재킷을 착용한 자원봉사자들을 네팔의 오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작업이 결실을 맺을지 여부, 그리고 인과응보적 정의의 제도화가 불처벌의 문화를 종식하는 데 성공할지 여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평화 과정과 시민사회의 역할

전쟁과 평화의 역사는 시민사회가 평화 과정을 향상시키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심할 바 없이 분명한 점은, 평화를 창출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시민에서부터 안보관계자들과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주체들이 여기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시민사회는 무기 관리와 동원해제가 큰 관심사인 갈등전환
conflict transformation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평화학자인 귄터 배힐러Guenther Baechler는 다각적인 외교 틀 안에서의 강력한 시민사회는 갈등전환과 평화구축에서 핵심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말한다. “강력한 시민사회는 건전한 사회조직의 보증인, 곧 내전 해소를 지지할 수 있는 자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다”(Baechler, 2005: 4).

그러나 네팔의 평화 과정에 대한 시민사회의 참여는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국가가 평화 과정에 공중이 참여하도록 권장하는 노력을 진정으로 기울이기는 매우 어렵다. 실질적으로 말해서 평화 유지는 무장 반란 투쟁을 종식시키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이를 넘어 투쟁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고 평화 전환을 촉진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정치적․사회적 전환 과정이다. 왜냐하면 거버넌스, 안보, 개발, 인권 정책과 실천상의 구조적 변화에 집중하면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Barnes, 2002). 이 점에서 네팔의 평화 과정을 민주화하는 데 대한 시민사회의 기여도는 중차대하다(Upreti, 2006).

시민사회조직들(CSOS)은 네팔의 정치사에서 인권을 수호하고 민주주의를 신장하는 데 있어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1990년 이후 등장하여 성장해온 NGO들은 달리트, 여성, 소수민족, 기타 소외 집단들의 의식을 제고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수호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어서 핵심 역할을 했다. 그 의식의 힘은 2006년 4월 네팔에서 독재 체제에 반대하는 민중운동으로 나타났다.

몇 달 후 정당 지도자들과 간부들이 나서서 시민사회조직들과 손잡고 네팔에서 군주제를 타도하였다. 2006년 4월 네팔 국민들은 투쟁에서 승리했고, 왕은 퇴위하고 다당제 민주주의의 회복 작업이 진행되었다. 분명 시민사회는 갈등전환과 평화구축 과정에서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대중과 대화를 통해 국민들의 관심사를 제고하고, 정치개혁을 세부적으로 설명하며, 평화회담과 협상을 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대중 회합과 집회를 힘써 조직하여 이뤄낸 결과이다
(Dahal, 2005; Upreti, 2006).

시민사회는 부단한 노력을 통해 UN 인권고등판무관실(OHCHR)이 네팔에 사무실을 두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인권고등판무관실은 인권 보호에 큰 역할을 하면서 네팔 내에서 그들이 유능하고 헌신적이며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점을 언급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UN은 상당히 관료적이어서 그들이 무기와 군대 관리에 개입할 때는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기와 군대를 관리할 때는 관료적 절차와 관행이 전환 과정을 지연시키거나 방해하지 않는지 부단히 감시할 필요가 있다. 일단 UN이 무기와 군대 관리에 개입하면 모든 주체들의 협력과 지원이 있어야 그 책임을 순조롭게 완수할 수 있는데, 여기에 시민사회가 건설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네팔의 평화 과정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면서 UN의 무기 관리를 지원하고 있는 몇몇 국제적인 쌍무적․다자적 기관들이 있는데, 시민사회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들과 만족스럽게 협력해왔다.

시민사회조직들이 이 나라에서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의 실현 시도들을 촉진하고 지원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종종 수행해왔다는 사실은 하나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불행히도 많은 나라에서는 갈등 후의 상황에서 시민사회가 약하고, 조직화되어 있지 않고, 독립성이 결여된 경우가 흔하다.

이에 반해 과거의 인권침해 사례들에 대해 모종의 책임을 묻겠다는 결정이 내려진 네팔에서는, 인권 공동체와 조직화된 생존자 단체들이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과도 정부들로 하여금 행동에 나서도록 압력을 가해왔다. 다양한 국적의 인권 활동가들도 갈수록 정부에게 과거와 정면으로 맞서도록 추가적인 압력을 가하는 한편, 정부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과도적 이행기 정의실현에 관한 전문지식을 제공해주고 있다.

시민사회 자체도 과거의 인권침해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사회의 여러 계층 사람들을 여기에 참여시키고, 이행기 정의실현의 경험에서 배운 교훈을 더 많은 국민들에게 확산시키는 데 있어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

빈곤의 정치

인권, 자유, 정의에 대한 중대한 침해의 의미도 지니는 빈곤 문제는 네팔에서 현재 진행되는 정치적 담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발전 우선과제, 정책 및 전략은 관료적 관점에서 개발되어왔지만 그것은 결함이 있는 접근방식임이 드러났다.

왜냐하면 빈곤을 해결하려는 수십 년간의 시도들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난 50년간 빈곤 감소를 위한 정책, 프로그램, 전략들을 관장해온 비효율적인 정치․사회제도의 결과이다. 그러나 빈곤은 정치적 문제라고 보아야 하며, 어떤 정치적 해법이 필요하다.

빈곤은 여성, 달리트, 소수민족 집단, 장애인, 기타 불우한 집단들을 소외시키는 네팔의 사회정치적 구조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이런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기술적 해법은 “두통을 복통약으로 치료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빈곤 해결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접근을 보장하는 민주적 거버넌스
(정치 체제)를 필요로 한다.

덧붙이자면, 빈곤을 줄여나가는 데 있어 국제기구들의 역할은 효과적이지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빈곤을 사회정치적 문제로 보기보다는 기술적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국제기구들의 원조 행정은 상명하달식에다 기술 중심적인 것처럼 보인다. 정부의 빈곤 감소 전략 문서Poverty Reduction Strategy Paper(PRSP) 자체가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작성되고 있다.

PRSP는 국민들과 협의 없이 개발되었다. 마찬가지로, 세계은행은 일부 시민사회조직들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정부로 하여금 빈곤 경감 기금을 창설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힘의 법이 법의 힘을 이길 때

선거도 성공적으로 치렀고 휴전도 지속되고 있지만 네팔의 평화과정은 이제까지 겪었던 것 중 가장 엄중한 시험에 직면하고 있다. 포괄적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협정의 준수 여부를 감독할 어떤 감시 체제도 마련되지 않았다.

그 결과 포괄적 평화협정 조항들을 위반한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했지만 누구도 전혀 처벌받지 않았다. 정치적 합의를 산출한다는 미명하에 범죄자들을 사면해주다 보니 법치주의의 기본 원리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선거가 끝난 지 20개월이 지나서 헌법 기초 과정이 마침내 진행 중이지만, 평화협정의 주요 부분들은 여전히 이행되지 않고 있다. 포괄적 평화협정에 규정되어 있는 과도적 위원회들 대부분은 아직 구성되지 않았다. 불처벌이 만연해 있고 공공 안전은 놀라울 정도로 취약하다. 평화협정 과정의 저변에 깔려 있던 합의는 낡아가고, 당사자들 간의 관계는 갈수록 대립적으로 되고 있으며, 협정의 근본 요소들이 도전받고 있다. 내전 후의 조직범죄와 폭력이 사회를 멍들게 하는 가운데 법과 질서에는 눈에 띄게 공백이 생겨나고 있다.

마오이스트들이 이끈 행정부의 집권 9개월은 답답한 것이었고, 논란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정부의 업적도 무색해졌다. 마오이스트들의 장기적인 의도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그들의 강경 전술은 여전히 인민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하는 혁명 전략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오이스트들이 권력에서 스스로 물러나고 2009년 중반 새 연립정부가 구성된 뒤에도 연립 파트너들 사이에 힘과 뜻을 합치려는 노력이 거의 없으며, 야당인 마오이스트들은 조직이나 정치면에서 지리멸렬한 상태에 있다. 기성 정당들도 그들의 빈약한 실적을 만회하면서 대표성을 제고하고 유권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개혁의 필요성을 아직 절감하고 있지 않다.

마오이스트들과 네팔군 사이에서 높아가는 긴장은 안보 부문의 미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연방제 실시와 같은 문제들은 치열한 논쟁을 유발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전들을 해결하는 것이 네팔 지도자들의 업무이기는 하지만, 국제사회도 평화 과정의 취약성을 인식하고 그 과정을 고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국제적 주체들은 평화를 증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지금은 모든 당사자들에 대해 자신들이 약속한 사항들을 준수하도록 부단한 압력을 가하고, 스스로 평화에 대한 위협에 대처하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다. 평화협정의 일부 조항들이 유명무실해지도록 방치하면 전체 과정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네팔의 정치 지형은 불가역적으로 변화되었다. 마오이스트들은 2008년 4월의 제헌의회 선거에서 당당히 승리함으로써 지하 반군에서 공개적인 정치로 이행하는 데 성공했다. 네팔 국민들은 지속적인 평화를 확립하고 변화를 이루어내면서, 선거를 통해 모든 정당에게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했다.

특히 빈곤, 차별, 배제, 불처벌, 자원에 대한 접근 제한, 정체성의 인정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봉건적이고 배제적이며 부패한 정치가 현재의 정치적 관행 속에 남아 있기는 하나, 정치의 형태는 이전과 다른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새로운 제헌의회는 네팔이 이제까지 선출한 기관들 중 가장 포용적인 기관으로, 많은 카스트 집단, 소수민족 집단 그리고 지역 공동체들이 과거의 의회들보다 더 많은 대표성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이제는 여성들이 의석의 3분의 1을 점하게 되어 네팔은 역내의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앞서게 되었다.

그렇지만 네팔 정치의 교착 상태는 발전적 변화의 추구에 계속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국민의 위임 사항은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는 단일 정당이 행정을 담당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당들이 협력하여 평화와 변화의 길로 나아가라는 것이었다.

네팔 국민회의와 네팔 공산당-UML
(통합 마르크시스트-레니니스트)은 선거가 끝나면 결과에 관계없이 합의와 협력을 기초로 일하겠다는 분명한 약속을 내걸고 선거에 임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를 주저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타협을 위한 카드일 수도 있겠으나, 평화 과정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낮은 대중적 신망을 더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

건강한 토론과 다양한 정책 입장이 제시되는 것이 바람직한 입헌 과정에서, 그들은 건설적인 참여자로 여겨지기보다 심술궂은 훼방꾼으로 비춰질 위험을 안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대표성을 제고하기 위한 내부 개혁을 미루면 미룰수록, 환멸을 느낀 이전 지지자들과 다시 연결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마오이스트 지도부도 내적으로 자신들의 강력한 지위를 지렛대 삼아 폭력과 강요의 정치를 단호히 배척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지 못했다. 그 운동 내에서도 많은 의문이 제기된 ‘평화적 해법’ 전략은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내부의 논쟁과 외부의 압력에 직면하고 있다.

안보 부문이 중대한 문제로 남아 있다. 두 개의 상비군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은 내재적인 불안정 요인이다. 초기의 마오이스트 정부가 네팔군
(NA)과 그들 자신의 군대를 모두 지휘하는 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고 그것은 타당한 우려였다.

그러나 안보 부분의 장래를 논의하기 위한 모든 제안에 한사코 저항하면서 2년을 허비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야기한 것은 네팔군과 주류 정당들이다. 네팔군은 어떤 의미 있는 민주적 통제의 바깥에 놓여 있고, 따라서 순조로운 권력 이양을 보장할 견제와 균형이 없는 실정이다.

안보 부문 외에도 다른 화급한 난제들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 법과 질서가 엉망이며(특히 일부 타라이 지역에서 그러하다), 불처벌의 문화도 예전 그대로이다. 내전 중에 몰수한 토지를 돌려주는 문제와 약속한 토지개혁을 입안할 위원회를 설치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아직 진척이 없다. 평화를 확보하려면 지역과 마을 수준에서 시행될 조처들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지금까지는 지방정부의 초보적 요소들을 재확립하는 데 관한 합의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

국민들의 운동이 위임해준 신속하되 부드러운 체제 이행은 독재적․봉건적․중앙집권적․차별적 정치 거버넌스 체계를 민주적․포용적․분권적 체제로 바꿔나가는 것이다. 네팔의 정치 경제가 지난 수년간 급격히 변하기는 했으나, 이 나라는 정치․사회․경제 제도를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쪽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그들의 지속적인 투쟁에도 불구하고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거버넌스 체제는 네팔 국민들의 삶 속에서 아직 구현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심각하게 토의되는 문제는 인권친화적이고 포용적이며 참여적인 민주헌법을 공포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대략 1만 9천 명인 이전 마오이스트 전투원들의 미래 문제와 그들의 네팔군 내 통합, 대표성 모델
(지역구와 비례대표제의 선거 형태)의 결정, ‘새로운 네팔’을 재창조한다는 숭고한 꿈의 프로젝트 속에서 자결권을 실효성 있게 구현한다는 취지에서의 연방구조와 같은 쟁점들을 원만하게 해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네팔은 정치적으로 말해서 민주주의라는 장밋빛 길을 향해 가고 있다는 국제사회에 널리 퍼진 전망은 위험할 정도로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기는 하나, 빛나는 미래는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망으로서 남아 있다.

네팔은 현재 과거로 퇴행하는 움직임의 가장자리에서 비틀거리고 있다. 국제적인 관점의 렌즈를 통해 네팔을 ‘빛나는 민주주의’로 성급히 재단하는 것은 하나의 착시에 지나지 않는다. 허약한 민주주의가 과거로 회귀하는 딱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네팔은 앞으로 수십 년간 값비싼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뿐 아니라 세계무대에서까지.

※고팔 크리슈나 시와코티는...

철학박사(PhD). 1987년부터 현재까지 INHURED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INHURED(International Institute for Human Rights, Environment and Development: 인권, 환경과 개발을 위한 국제기구)는 네팔 최초의 국제적 인권단체이다. 시와코티는 1994년부터 현재까지 국가선거감시위원회(NEOC) 사무총장직을 수행해오고 있다. 특히 2008년의 제헌의회 선거에서 국내외 선거감시인단의 활동을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국제선거감시인단의 일원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선거감시인들을 훈련시키는 활동도 벌이고 있다. 2009년부터 현재까지 아시아태평양난민인권네트워크의 공동회장으로 활동하며 난민들의 인권옹호에도 힘쓰고 있다.





지난 9월 14일은 네팔어린이날 이었어요
우리 서로서티학교 운동장을 가득 차지했던 물도 빠지고 해서
모처럼 마을 어른들 모시고 어린이날 잔치를 했습니다
덩실덩실 장기자랑도 하도 선물도 받았어요 ^^







한국에도 비가 잦았던 이번 여름, 네팔도 그랬습니다.
본래  5월중순부터 8월말까지는 우기라 비가 끈덕지게도 내립니다.
그런데 이번 여름에는 참으로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특히 지난 주에.

공사중이던 우리 학교 새 건물은 1층 마무리 하는 중에 비가 자주 내려 잘 진행이 안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강풍과 함께 거센 비가 내려 본래 있던 교실 지붕이 다 깨지고 내려 앉았습니다.
벽돌로 지은 벽 위에 대나무로 얼개를 짜고 그 위에 함석 지붕을 얹었는데
대나무가 썩어 약해진 탓인지 함석지붕을 붙잡는 힘이 약해져
비바람에 지붕이 홀랑 날아간 것이지요

그래서 급히 돈을 얻어 그 보수공사를 하려는 차에
그만 비가 엄청나게 쏟아져 학교 옆을 흐르던 머노호라 천이 넘치고
학교와 마을로 밀려 들어온 물이 종아리까지 찼습니다.

맨바닥이던 교실은 진흙과 흙탕물이 들어 찼으니
물이 빠진다 해도 책상이며 의자가 뒤틀리고 녹슬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나마 집터를 조금 올려서 지은 집은 집안까지 물이 차지 않아 다행인데
터 잡을때 돈이 없어 그냥 맨바닥에 벽돌만 쌓았거나 비닐천막만 덮은 집 식구들은
오갈데가 없는 형편입니다.

제발 이제 비가 그만 오고 어서 물이 빠지기를 기도합니다




<비바람에 달아난 지붕을 손보러 올라갔습니다>



<지붕을 채 고치기도 전에 또 비가 쏟아지더니 개천까지 넘쳐 이젠 물바다가 되었네요
건축자재도 모두 물에 잠겨 다시 쓸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부실하게 쌓은 벽이 혹시나 무너질까 싶어 다시한번 점검합니다.
아직은 그럭저럭 괜찮은 모양...>




<이런, 동네가 물에 잠겼으니 개구장이 꼬마들은 오히려 신이 났습니다
위험하니 나가지 말라는 엄마 잔소리는 아이들 뒤꼭지에서 맴돌고...>



<우리 집에 물이 안 들어와서 다행이군. 무궁화꽃과 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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