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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에 계신 아빠, 이젠 전화 안 해요

by 아연대 2010. 6. 4.

한국에서 사망한 노동자의 가족 중 열두 가족을,
지난 2006년 7월부터10월까지 찾아다니며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가족들 가슴에 담긴 애절한 이야기를 
<꿈 그리고 악몽>으로 엮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며 후원금이 모이기 시작하여,
지금 진행하고 있는 네팔장학사업의 종자돈이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마음을 보태고 계신 덕에 2010년 6월 현재 모두 24가족 50자녀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한 네팔의 찬드라 라이씨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본국에서의 빈곤과 실업을 견딜 수 없어 한국에 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막막함의 돌파구로 혹은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대표선수가 되어, 자신을 반기지 않는 낯선 땅에서 오로지 고국에 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하며 '일하는 기계'로서의 삶을 기꺼이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에서의 열악한 삶과 노동에 대해 보통은 가족들에게 말하지 못합니다. 사람들도 잘해주고 일하는 것도 힘들지 않다는 착한 거짓말로 걱정하는 가족들을 안심시키고는 집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으며 생활합니다.


자녀들을 남기고 떠난 이주노동자의 경우는 더욱 어렵습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얼굴도 가물가물한 아빠와 이따금 통화를 하고 때때로 부쳐주는 선물을 받으며,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여전히 한국행은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기회'이고 '행운'이지만, 이주노동을 떠난 가족을 기다리는 마음은 언제나 노심초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코리아다', '한국이다'라는 한 마디 외에는 어디에 붙은 지도 모르는 먼 나라, 말도 음식도 종교도 문화도 낯설기만 한 땅으로 떠난 가족이 어떻게 일하고 생활하는지를 도무지 짐작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보고 싶은 아빠는 기억 속의 모습으로 그대로 멈춘 채, 그대로 영영 이별을 하는 가슴 아픈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네팔 이주노동자 찬드라 라이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이주노동을 마치고 돌아가면 예쁜 집을 짓고 단란하게 살겠다는 꿈으로 열심히 일했지만, 안전표시판 하나 없는 공사 중인 도로에서 그의 삶은 끝나버렸습니다.



[딸이 본 아빠]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 거짓말만 하는 엄마


이건 우리 아빠구요, 이건 우리 엄마구요, 이건 제 동생이구요, 이건 나예요. 그리고 이 집은 나중에 우리가 살 집이예요. 이 그림은 내가 그렸어요. 잘 그렸죠? 지금은 할머니랑 동생이랑 엄마랑 살고 있어요. 위에는 이모가 살아요.


아빠는 왜 같이 안 사냐하면요, 아빠는 아주 먼 곳에 있대요. 코리아라고 아주 먼 나라래요. 내가 아주 어릴 때 아빠가 코리아에 가서 나는 아빠 얼굴이 생각 안나요. 방에 아빠 사진이 있지만 사진에 있는 아빠는 좀 이상해요. 아빠 같은 느낌이 안나요. 친구들 아빠는 따뜻한 느낌이 나는데 우리 아빠는 그런 느낌이 안 나서 이상해요.


우리 아빠는요, 키도 크고 힘도 엄청 세대요. 나 같은 여덟 살짜리 꼬마는 100명도 들 수 있을 만큼이요. 아빠가 돌아오시면 엄마 말이 맞는지 아빠 팔에 꼭 매달려 볼 거예요. 왜냐면 가끔 우리 엄마는 저에게 거짓말을 하거든요. 아빠는 곧 돌아오신다, 곧 돌아오신다 하셨는데 아빠는 아직도 안 오셨어요. 엄마는 나한테는 거짓말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서, 우리한테는 거짓말을 해요.


저는 그림 그리는 거랑 공부하는 걸 좋아해요. 아빠가 옛날에 한국에서 전화했을 때요. 열심히 하라고 하셨어요. 내가 공부하는 걸 싫어했으면 아빠 말을 듣지 않는 나쁜 어린이였을 텐데, 저는 다행히 공부하는 게 재미있어요. 아빠가 오실 때 선물 많이 사온댔어요. 다시 아빠한테 전화 오면 영어노래 테이프를 사다 달라고 말할 거예요. 내 친구들은 영어노래를 많이 아는데 나만 몰라요.


그런데 내 동생은 참 말썽꾸러기예요. 공부도 안 하고 매일 엄마, 할머니 옆에 붙어서 떼만 써요. 또 내가 공부하거나 그림을 그리면 옆에 와서 나를 귀찮게 해요. 종이도 막 찢고, 크레파스도 부러뜨려요. 그럴 때마다 아빠 오면 다 말할 거라고 동생한테 겁을 줘요. 그럼 말을 잘 듣는 척해요.


동생은 한 번도 아빠 얼굴을 본 적이 없어요. 나는 어릴 적 아빠랑 찍은 사진도 있고, 아빠랑 전화로 얘기한 적도 있지만, 동생은 그런 사진도 없고, 아빠랑 얘기한 적도 없어요. 아빠가 한국 가실 때 동생은 엄마 뱃속에 있었기 때문에 아빠를 보지 못했대요.


엄마가 아빠 보시라고 동생 사진을 보냈어요. 아빠가 전화했을 때 우리 동생은 말도 못하는 아기였어요. 엄마가 전화기를 귀에 대주면 막 빨아 먹으려고 했어요. 지금은 동생이 말을 잘하는데 아빠가 전화를 안 해요.


엄마는 아빠가 바빠서 그러신다, 전화하실 거다 그랬어요. 그런데 엄마는 또 거짓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내일이 되면 아빠는 꼭 저에게 전화하실 거예요. 옛날에 아빠한테 어떤 집에서 살고 싶으냐고 물어봤어요. 우리가 살 집을 그리려고 했는데, 아빠는 어떤 집이 좋은지 아직 말씀을 안 하셨어요.


나는 1층에 꽃밭이 많은 집이 좋고, 엄마는 3층짜리 예쁜 집이 좋다고 했고, 장난꾸러기 동생은 다 좋다고 했어요. 할머니는 아빠가 좋아하는 집이면 다 좋다고 하셨어요. 나는 아빠도 꽃밭이 많은 집을 좋아할 것 같아서 내 맘대로 그렸어요. 내 그림에는 아빠도 있고 엄마도 있고 동생도 있고 할머니도 있고 나도 있어요.



[아내가 본 남편]
일 년 후 돌아온다던 약속이 영원한 작별로


저는 아이들에게 거짓말만 하는 나쁜 엄마가 되었네요. 오늘도 엄마는 매일 거짓말만 한다고 따지고 드는 딸아이에게 아무런 대답도 못 했답니다. 마냥 아기로만 생각했던 딸아이가 이제 훌쩍 커서 엄마에게 귀여운 잔소리를 늘어놓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아이들 아빠는 이번 더서인(네팔의 추석)에는 꼭 돌아오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아빠 목소리를 듣겠다고 전화에 매달리는 딸도 보고 싶고, 태중에 있을 때 떠나 여태 얼굴도 못 본 아들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딱 일 년만 더 일하고 오겠다더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농사짓는 집안에서 태어나 아무것도 없이 어머님을 모시고 카투만두로 왔습니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먹고 살기도 힘들었고, 무엇보다도 시골에서는 아이들 교육시킬 방법이 없었습니다. 가진 것도 없고, 기댈 곳도 없었지만 남편을 따라 카투만두로 와서 어렵사리 집을 구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도시로 올라온 것을 후회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한국에 가게 된 것입니다. 여윳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 우리는, 한국에 가는데 필요한 돈을 대느라 친척들마다 찾아다니며 사정사정해서 돈을 얻었습니다.


남편이 사고당하기 이틀 전에 전화를 했어요. 두 달 치 월급을 송금했으니 가서 받으라고요. 돈 모아서 집을 짓자고 했어요. 그런데 요즘 딸애가 아빠가 하던 소리를 똑같이 하고 있네요. 그림을 그리면 맨 날 예쁜 집에 우리 식구가 사는 그림만 그리고…. 참,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 소리를 하는지….



이제는 더욱 억척스러워져야만 합니다.


남편은 일을 마친 주말, 친구들과 술을 마신 뒤 친구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탔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때가 2005년 8월, 남편이 한국에 간지 4년째 되던 해였지요. 늦은 시간 도로 공사를 하던 길이었다는데, 아마 막힌 길인지 모르고 밤길을 달리다가 맞은편 벽에 부딪혔나 봐요.


앞에 탄 사람도 그때 죽었다는데, 그분 가족도 우리처럼 힘들겠죠? 그 집도 하루아침에 가장을 잃었을 테니까요. 저는 억척스럽게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또 먹지만 자꾸 세상에 있지도 않은 남편을 생각하게 돼요. 어머니는 이제 됐다고, 다시 시골에 내려가서 살자 하세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제가 이 험한 카투만두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어 어머님 말씀을 따를까 생각하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 때문에 쉽게 결정할 수가 없어요. 남편이 없어도 아이들만큼은 반듯하게 키우겠다고 제 자신과 한 약속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해요. 저축한 돈도 떨어져 가고 아직 3년은 더 제가 아이들 곁에 있어야 할 텐데, 어떻게 견뎌야 할지…….


아직 보상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요. 도로공사 회사에서 보상금을 조금 줬는데 회사 사장님이 횡령해서 벌을 받고 있다 하고,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고도 들었어요. 한국에 있는 인권단체에서 일을 맡아서 하고 있는데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여기서 필요하다는 서류를 만들어 보냈는데 여러 번 서류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고치고 또 고치고 했어요.


문제가 잘 해결되어서 조금이라도 보상금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간단한 기술이라도 배워서 조그만 가게를 열고 싶어요.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아이들을 잘 돌보기는 어려울 텐데…. 아이들도 이해하겠지요. 애들도 금세 자랄 테니까요.



그 뒷이야기 


찬드라 라이 씨는 2005년 8월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중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사고현장은 새로운 도로를 만들던 건설현장이었다. 출입이 통제되어야 할 도로였지만 출입금지 표시나 다른 안전물이 전혀 없었다. 이 건설현장의 소장은 이후 안전시설물 미비로 불구속 기소되어 벌금을 선고받았다.


이 건설회사는 사망한 찬드라 라이와 수바스 구릉에게 위로금 조로 각각 500만원씩 1천만원을 지급했다. 그러나 이 돈은 유가족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당시 찬드라 라이 씨가 다니던 회사 사장은 건설회사에 연락해 자신이 돈을 받아 유가족에게 전달하겠다고 속인 후 돈을 가로챘다. 이후 횡령 혐의로 경찰에 고발되어 2006년 연말까지 의정부지법에서 재판이 진행되었으나 6개월째 재판에 출석하지 않아 제대로 된 재판이 열리지 못했다. 그는 검찰에서 자신도 불법체류자를 고용하여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벌금을 냈으므로 사망위로금으로 받은 돈을 유가족에게 지급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7년 1월 초, 사장이 구속된 후 친구를 통해 횡령한 위로금의 전달 의사를 밝혔고, 당시 사건을 담당한 변호사 사무실을 통해 사망자의 유족들에게 각각 500만원의 위로금이 전달되었다. 위로금은 찬드라 라이씨의 사망 사건에 관여했던 인권단체를 통해 2007년 1월 중순 네팔의 유가족들에게 송금되었고, 사장은 재판에서 징역 4개월 집행유예 1년의 형을 받았다. 그 후 경기도와 건설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좋은 결과가 나와 두 가족에게 배상금을 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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