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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도 썩고 꿈도 썩고.... "한국이 지옥같다"

by 아연대 2010. 6. 4.

한국에서 사망한 노동자의 가족 중 열두 가족을,
지난 2006년 7월부터10월까지 찾아다니며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가족들 가슴에 담긴 애절한 이야기를 
<꿈 그리고 악몽>으로 엮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며 후원금이 모이기 시작하여,
지금 진행하고 있는 네팔장학사업의 종자돈이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마음을 보태고 계신 덕에 2010년 6월 현재 모두 24가족 50자녀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쓸쓸히 홀로 숨을 거둔 삼세르 바하두르 타칼리씨


 

2006년 1월의 늦은 밤, 경찰서에서 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서울 종암경찰서인데요, 네팔인 추정 변사자가 있어요, 가족을 찾아야 되는데 도와주시겠습니까?"

"아…, 예…, 혹시 여권이 있나요? 여권상 이름과 주소를 알려주시면 알아볼게요…"


영세공장이 밀집해 있는 서울 성수동, 철거를 앞둔 한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바로 길 건너편에는 죽죽 뻗은 새 아파트가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습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이 골목도 얼마 후면 사라지고 저렇게 변신하겠지' 생각하며, 녹슬고 자그만 철제대문이 늘어선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그 중에 한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좁다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별채가 마주보고 서 있습니다.


삼세르씨는 그 별채에서 혼자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 한국에서 거주한지 5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철거할 집인지라 안채는 텅 비어있습니다. 다른 곳에 사는 집주인 아주머니가 오랜만에 들렀다가 심한 악취에 놀라 방문을 열어보니 삼세르씨가 죽은 채 썩어가고 있더라고 했습니다.


방문 앞에는 딱딱하게 굳은 빵과 우유가 놓여 있었습니다. 누군가 아픈 친구를 보러 왔다가 시신을 보고 놀라, 두고 달아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친구가 불법 체류 중인 상태였다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괜한 일'로 엮여 자신도 쫓겨나게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재기를 위해 어렵사리 감행한 한국행에서, 삼세르씨는 5년 만에 참으로 쓸쓸히 삶을 마감했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마지막 전화


"새벽 4시쯤인가 전화벨이 울렸어요. 깜짝 놀라 전화를 받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분명 한국에서 온 전화였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요. 그리곤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 땐 몰랐어요. 그것이 서방님이 우리에게 한 마지막 전화였다는 것을…."(삼세르씨 형수)


고인은 혼자서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감기였는지 몸살이었는지 아니면 그보다 더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따금 찾아갔다던 친구가 전해준 말도 그랬고 방 안에 찢긴 채 널려있던 약봉지를 봐도 그랬습니다.


타살 흔적은 찾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부검을 해야 했고, 가족에게 연락하고서 부검이 끝난 후 시신을 화장했습니다. 부검에서도 특이한 내용은 드러나지 않았고, 그의 사망일자가 2006년 1월 2일쯤이라는 것이 새로이 밝혀졌습니다. 약물검사 결과는 한 달 쯤이나 지나야 나올 것입니다.


"너무 늦게 알았어요. 시신이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썩어가고 있었다고 그러던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평소처럼 밥 먹고 잠자고 했는데…. 우리가 너무 늦게 알았어요…. 처음에는 우리가 한국에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시신이 너무 상해서 보지 않는 것이 더 좋겠다고 해서 한국에 화장을 부탁했어요. 애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애들을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재가 돼 오다니…."



"몇 달씩 월급도 못 받고... 그냥 돌아오라고 했는데"


"성실했어요. 아이들을 무척 사랑했지요. 다시 한국에 간 이유도 아이들 때문이었어요. 교육이라도 제대로 시키고 싶어 했어요. 네팔에서도 전에 이것저것 사업을 했는데 다 실패하고 재기하려면 목돈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한국에 가게 된 거죠. 아마 애들 때문에 주저앉고 싶어도 그렇게 못했을 겁니다.


서방님이 한국으로 간다니까 남편이 자기가 아는 한국 교수를 한분 소개해 줬어요. 가서 일자리를 부탁하라고요. 그 교수님은, 한국에서 일하기 힘드니 다시 네팔로 돌아가라고 했다더군요. 아마 일할 수 있는 비자가 아니니까 선뜻 일자리를 소개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올 수 없잖아요. 어떻게 간 한국인데요…. 어찌 일자리를 구했다고 나중에 연락이 왔는데…. 처음엔 안경 공장, 그 다음엔 실공장, 양계장, 양말공장…. 많이 옮겨 다녔대요."


주인이 떠나고 없으니 방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혹시 중요한 유품이 있는지도 찾아봐야 했으니까요. 유품은 유골을 가족에게 보낼 때 함께 보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유골을 받아 안으면 가슴이 무너질 텐데 나중에 유품이 따로 가면 똑같은 아픔을 두 번씩이나 겪어야 할 테니까.


꼭 닫혀있던 방문을 여니 싸늘한 기운과 함께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냄새가 쏟아져 왔습니다. 시신이 썩고 음식도 썩고 꿈도 희망도 썩어서 방 안에서 뒤섞인 채 고통스러운 냄새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방 한편에는 두꺼운 이부자리가 깔려 있고, 냄비며 그릇이며 음식찌꺼기가 널려 있습니다. 부엌이 따로 없으니 방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한 모양입니다. 삶이나 죽음은 참으로 간결하면서도 신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불법체류자로 일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을 겁니다. 몇 달씩 월급을 못 받기도 했는데 불법이라 어디 호소하기도 힘들다고 했어요. 그럴 때는 다 그만두고 어서 돌아오라고 했는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미안하고…."


이불 위로는 찢어진 옷가지가 뭉쳐 있었습니다. 함께 간 형사가 시신을 병원으로 모실 때 옷을 가위로 잘라 벗긴 탓이라고 변명처럼 말했습니다. 시신에서 흘러 나왔을 체액이 요를 까맣게 물들인 채 썩고 있었지요. 그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형사가 이불을 들춰 보라고 합니다. 외국인들은 이불 밑에 뭘 잘 숨기더라면서. 조금 들춰보니 아무 것도 없었는데, 다시 한쪽 끝을 들고 이불을 죽 당기니 돈 뭉치가 나옵니다. 노란 고무줄로 동여맨 만원짜리 돈 뭉치, 세어보니 78만원입니다.



썩은 체액으로 까많게 물든 이불에는 78만원 돈뭉치가


"아이들도 아버지를 참 좋아했어요. 한국에서 전화가 오면 고작 '네. 네.' 하는 대답이 전부였지만, 멀리 있는 아버지 사랑을 잘 알고 있었어요.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시동생은 아이들을 의사와 엔지니어로 키우고 싶어 했어요. 큰애가 대학 2년을 마치고 다시 공과대에 들어갔다고 했을 때 얼마나 좋아했다고요.


나 고생하는 건 다 참을 수 있으니 애들 잘 돌봐달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어요…. 조카들은 제게는 자식 같은 애들이에요. 우리 애들은 엄마랑 떨어져 아픈 상처를 안고 있어요. 엄마가 그렇게 떠나고 남은 식구들끼리 살아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몇 장의 사진과 수첩들, 벽에 걸린 옷가지와 수건 그리고 가방에 든 철 지난 옷가지들. 자질구레한 살림은 챙기고 말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수첩은 네 권이나 있는데 뭔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고, 숫자가 무척 많은 것으로 봐서 금전출납부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불 옆에는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회색 핸드폰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죽을 만큼 아플 때 친구에게 전화라도 했더라면….


"서방님이 죽었다는 소식이 왔을 때, 저는 집에 없었어요. 어떤 네팔 사람이 전화를 했다는데, 아버님이 받으셨어요.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해서…. 그 소리를 듣고 아버님이 한참이나 말씀을 못 하셨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가슴을 쥐어짜듯 말씀하신게 다예요. 지금은 슬퍼하는 모습을 잘 안 보이세요. 애들 생각해서 그러시는 것 같아요.


서방님이 마지막 전화를 했던 날이요, 아마 그날 돌아가신 것 아닌가 싶어요. 마지막 순간에 식구들 목소리라도 들으려고 전화한 것 같은데…. 그 전화가 안 들려서 그냥 끊었으니…. 이 휴대폰이에요. 서방님은 이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던 거예요. 그래도 이게 우리를 이어주는 끈이었을 텐데 서방님은 가고 이것만 남았으니…. 저는 가끔 그때 전화가 들렸다면 서방님이 내게 무슨 말을 했을까 생각해요. 애들 부탁이겠지요. 애들 잘 키워달라고 했을 거예요. 안 들리더라도 걱정말라고 했어야 했는데…. 에휴…. 그 말이 얼마나 듣고 싶었을 텐데…."



흩어진 가족, 고아가 된 아이들


고인은 일본에서 일하다가 한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일본으로 일하러 갔는데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나서 집을 나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달음에 네팔로 달려갔지만 결국 아내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고. 자포자기한 채 시간을 보내다가, 돈 벌어서 아이들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어 어렵게 수속해서 한국에 왔다고. 아내가 버리고 간 아이들이 형님 댁에서 자라고 있다고.


"큰애가 충격을 많이 받았나봐요. 갑자기 말도 안하고 밥도 잘 안 먹고. 지금은 학교도 그만두고 시골로 갔어요. 엄마가 그랬을 때도 잘 견딘 애들인데…. 애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그 애가 아버지 수첩을 계속 들여다봤어요. 보다가 울다가 했어요.


수첩에는 일했던 회사, 노동한 시간, 받은 월급, 송금한 돈, 친구들에게 빌려준 돈, 자잘한 생활비, 아이들 교육비에 대한 것이 모두 적혀 있었어요. 택시를 많이 타야해서 돈이 많이 든다는 내용도 있었고…. 또 한국이 지옥 같다는 말도 적혀있고…. 그리고 애들한테 미안하다는 말도 있었어요. 애가 그걸 봤어요."


대한민국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일 뿐인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집주인과 경찰과 상담소가 잠시 분주했을 뿐. 그러곤 그만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그의 존재감은 그저 그 정도일 뿐입니다. 그는 한 줌 가벼운 재가 되어 고향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고향집에서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하늘이 무너졌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가족은 흩어지고, 아이들은 고아가 되었습니다.





미등록체류, 그 끝없는 악몽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에 올 때 거액의 송출비용을 지불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고국에서 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집이나 땅을 담보로 사채를 얻어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빚을 갚고 목표했던 금액을 저축하기에 계약기간은 짧기만 하다.


현재 한국에서 40여 만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있으며, 이중 20만 명 정도가 비자없이 체류∙노동하는 미등록(불법 체류) 상태에 놓여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당연히 미등록 체류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또는 강요된 선택으로 미등록 체류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일단 비자가 만료되면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게 된다. 사업주 입장에서도 비자없는 노동자를 고용하다 적발된 경우 고액의 벌금 등 불이익을 받게 되므로 이를 피하려 한다.


따라서 비자가 없으면 직장을 찾는 일부터 쉽지 않다. 당연히 미등록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업장은 등록노동자를 고용하기 힘들 만큼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고, 때로는 가짜 휘발유 제조업체와 같은 불법사업장에 자신도 모르게 고용되어 큰 피해를 입기도 한다.


미등록노동자들은 항상 출입국 단속반에게 쫓기는 신세이다. 역 주변과 시장, 식당과 같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가는데 두려움을 느낄 뿐 아니라, 잠을 자거나 심지어 사랑을 나눌 때도 단속반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고 한다.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신분이 노출될까 두려워 부상 당한 몸으로 도망가기 바쁘고, 단속반에 쫓겨 높은 곳에서 추락하기도 한다. 또한 미등록노동자가 자신의 불안한 신분 때문에 피해를 입더라도 신고하지 못한다는 점을 악용해, 고의로 임금을 지급하지 않거나 불합리한 처우를 일삼는 등의 차별 행위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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