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사망한 노동자의 가족 중 열두 가족을,
지난 2006년 7월부터10월까지 찾아다니며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가족들 가슴에 담긴 애절한 이야기를 <꿈 그리고 악몽>으로 엮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며 후원금이 모이기 시작하여,
지금 진행하고 있는 네팔장학사업의 종자돈이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마음을 보태고 계신 덕에 2010년 6월 현재 모두 24가족 50자녀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코리안드림 꿈꾸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내 남편 '라자'
2003년 2월 12일, 대구의 작은 공장 기숙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노동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아내와 두 자녀를 네팔에 두고 온 37살의 이주노동자 비렌드라 비끄럼 사아, 애칭 '라자'였습니다. 마땅한 일거리가 없는 네팔에서 실패를 거듭하던 그는, 어렵사리 입국한 한국에서 강도높은 노동과 낯선 땅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한국행은 먼저 와서 일하고 있던 처남의 제안에 솔깃해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살 길 막막한 네팔에서 '기회의 땅'이라 믿고 찾아온 한국은 그에게 '죽음의 땅'이 되었습니다. 지난 2월의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사망자 중에도 한국에서 가정을 꾸린 여동생의 초청으로 입국해 일하다가 변을 당한 중국 이주노동자가 있었습니다. 살아남기 어려운 가난 속에서 어떻게든 도우려는 혈육의 정이 때로는 평생 돌이킬 수 없는 멍에를 안기는 일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네팔에서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매형을 한국으로 불러들였던 처남은, 누이의 가족 앞에 그리고 매형의 죽음 앞에 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가슴에 품은 '코리안 드림'으로 두 번이나 한국행을 감행했던 그는 결국 매형의 유골을 안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슬픔보다 그들에게 더 무겁고 절실한 것은 당장 살아내야 하는 '오늘'입니다.
A사장이 네팔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든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리나케 쫓아갔습니다. 그이는 네팔 사람을 한국에 노동자로 보내는 회사 사장입니다.
회사에 갔더니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몰려든 네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더군요. 저는 A사장을 만나야 한다고, 꼭 만나야 한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제 속에서 어떻게 그런 악다구니가 나왔는지 제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에도 통화했던 내 남편이
그 날, 그러니까 2003년 2월이었을 거예요. 특별한 일이 있어서 시댁에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보통날처럼 절에 가는 길에 시댁에 들렀는데 분위기가 많이 달랐어요. 어른들께 제가 무엇을 여쭤도 대답도 안 하시고 뭔가 침통해 보였어요.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그래서 일하는 아이를 붙잡고 물었지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거냐, 어서 말을 하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옆에 계시던 시댁 어른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이제 세상에 라자는 없다. 그러니 이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
저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어리둥절했습니다. 며칠 전에도 통화했던 남편인데, 그 남편이 세상에 없다니요.
저는 '장난이야, 거짓말이야, 아닐 거야, 아니야, 아니야…' 아득한 정신을 수습하면서도 마음 속 깊이 그 사실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쳤습니다.
딸과 통화하면서 울던 그이... 잔소리해서 미안해
가난이 죄였습니다. 가난해서 한국으로 일하러 가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할아버님 밑에서 온 형제가 함께 모여 살다가 우리 식구만 따로 살림을 나면서 형편이 어려워졌습니다.
하던 장사가 망하면서 한국으로 가려고 결심했던 겁니다. 그리고 2001년 어렵게 연수생으로 한국으로 가 대구에서 1년 8개월 정도를 일했습니다.
남편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우리가 어른들과 떨어져 살게 되었으니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열심히 벌어보낼 테니, 애들 공부 시키고 저축해서 새롭게 시작하자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정말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네팔에서의 안 좋은 기억은 그렇게 서로가 열심히 생활하면 잊혀질 거라고 생각했었지요.
애들한테도 얼마나 끔찍하게 잘 했는데요. 우리 딸은 아빠 전화만 받으면 울었어요. 남편도 전화기 붙잡고 딸과 이야기하며 많이 울었어요. 그럴 때마다 저는 남편에게 잔소리를 했어요. 당신이 그렇게 마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어쩌느냐고요. 당신이 무너지면 어쩌라고 자꾸 애하고 울고 앉았느냐고요.
매형 유골 안고 돌아온 동생
그런데 지금은 그게 후회됩니다. 그러지 말걸, 어린 딸에게 하소연하며 실컷 울도록 그냥 내버려나 둘 걸 하면서요.
제 아버지 목소리 들을 때마다 울던 딸은 이제는 눈물이 말랐나 봐요. 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넋 나간 애처럼 굴더니 아버지를 잊으려고 노력하는가 봐요. 지금은 아버지에 대해서 말도 못 꺼내게 합니다. 제 가슴에서 아버지를 지우려는 것 같아요.
제 동생이 한국에 먼저 갔어요. 동생은 한국에 두 번 갔는데, 한 번 연수생으로 갔다 와서 다시 한 번 신청해서 또 갔어요. 두 번째 갔을 때, 매형도 네팔에서 힘들면 한국에 오라고, 수속도 대신 해주고 비용도 대주면서 매형을 데려갔어요.
지금은 매형을 자기가 한국으로 불러내서 돌아가시게 했다고 비통해 해요. 두 번째 연수를 중단하고 매형 유골을 모시고 와서는 다시는 한국에 가고 싶지 않다며 안 돌아갔어요. 비자도 많이 남았는데 가기 싫다고 해요.
다른 사람들도 한국에 일하러 갔다가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보상금을 얼마를 받았네 하는 소문이 마을에 화젯거리가 된 적도 있고요.
하지만 그것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설마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죽음보다 더 가혹한, 적나라한 삶의 무게
남편을 잃고 한 1년쯤 지났을까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차라리 밤새 죽었으면 좋겠다며 잠이 들어도 아침이면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있더군요. 그제야 아이들도 눈에 들어오고…. '어차피 죽을 수 없다면, 애들하고 살아야 한다면, 그래 열심히 살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에서 일하다 남편처럼 심장마비로 죽었다던 사람들도 다 보상금을 받았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A사장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 보상금을 받을 수 없다면 이유가 뭔지 그것만이라도 알려달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무척 힘들게 A사장을 만났습니다. A사장은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니 보상금을 많이 받기는 힘들 거고, 관리회사에서 얼마간 돈을 받을 수 있을 테니 서류를 만들어 한국으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류 작성해서 보내고 한국에 연락해 보니, 서류 잘 받아서 처리하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했어요.
한참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어요. 몇 달이 지났는지 모르겠는데, 그 A사장이 또 네팔에 왔다는 소식이 있기에 또 쫓아갔어요. 이번에는 아들을 데리고 갔어요.
A사장은 조금 있으면 122만루피(약 1800만원)를 받게 될테니 기다리라고 하면서 기회가 되면 아들을 도와주겠다고도 말했어요. 제게는 그 돈을 받으면 자식들 공부 잘 시키고 아껴써서 집 단장 예쁘게 하고 잘 살라는 말도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이제는 살았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그 사기꾼 같은 놈이 2년이 넘도록 돈을 안 보내주더군요. 꼭 자기가 우리 식구들 먹여살릴 것처럼 '아들이 어쨌네, 집을 잘 꾸며야 되네' 하는 소리를 왜 하느냐구요. 그 뒤로는 소식이 끊기고 A사장이라는 사람과 연락도 안 됩니다.
마흔 넘은 과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한참 뒤에 어느 날이던가, 한국의 인권단체에 계신다는 어떤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분께 우리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후에 그분이 일하는 단체를 통해 서류를 몇 장 받기는 했는데, 온통 한국어로 되어 있으니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에요.
다른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처음부터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고, 그렇게 얘기했더라면 지금 우리 식구들도 이렇게 마음이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겁니다. 받을 수 있다고, 정확한 금액까지 말해주었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 소식이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애들이 장학금 받으며 공부하고 있으니 당장 학비는 그렇다 쳐도, 제가 끝까지 자식들 공부시키고 결혼까지 시킬 수 있을지 자꾸 자신이 없어져요. 우리 네팔에서 마흔이 넘은 과부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뭘 하자고 들어도 당장 돈 한 푼이 없는데요….
* 2006년 11월, 고 비렌드라 비끄럼 사아씨의 유가족은 위에 언급된 인권단체의 도움으로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현대판 노예' 산업연수제, 고용허가제로 바뀌었지만
'외국인산업기술연수제도'를 부르는 줄임말이다. 본래 의미는 이름 그대로 저개발국의 인력을 국내에 초청하여 산업기술을 전수해준다는 것이나, 실제로는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는 데 활용되었다.
연수생들은 실제로는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으나 그 신분을 '연수생', 즉 학생으로 강요당하며 기본적인 법의 보호조차 받지 못한 채 고통받아 왔다.
1995년 연수생보호지침이 만들어져 폭행 및 강제근로 금지·최저임금 보장·산업재해보상보험·의료보험 등 일부 권리 보호를 받게 되었으나, 이후로도 근본적인 모순은 사라지지 않았다.
'현대판 노예제'라는 원색적인 비판 속에서도 산업연수제도는 많은 이주노동자들에게 '코리안 드림'을 향해 가는 통로 역할을 해왔다.
산업연수생들은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엄청난 송출비용을 브로커에게 지불하고 입국했으나, 막상 대한민국에 입국해서는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과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된 차별과 인권침해를 감내해야 했다.
1994년 11개국에서 2만여 명을 도입하며 시작된 연수제도는, 2004년 15개국에서 14만 5000여 명을 도입하는 규모로 확대되었으나, 2007년 외국인력제도가 고용허가제로 일원화됨에 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고용허가제 또한 이주노동자의 노동권을 충분히 보장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앞으로도 제도를 개선하고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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