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활동 (상호문화교육 강사단의 이야기를 모았습니다.)
◆ 나고야에서 온 히로미씨 이야기
요즘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기업과 한국노동자 사이의 개인 손해배상청구권으로 인하여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평화롭지 못합니다.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의미로 시작된 시민들의 불매운동이 언제부턴가 다른 것들에 가려져서 일본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배제하고 양국국민들이 서로 미워하는 일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 초등학교에 수업을 하러 갔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시작종이 울리기 전에 교실 앞에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 1학년 학생이 저를 보자마자 “나 일본 싫은데.”라고 소리치며 들어가더군요. 제가 들어가서 일본어로 자기소개를 하자 “선생님, 일본말 하지 마세요. 듣고 싶지 않아요.”,“우리 엄마가 집에 있는 일본 물건 다 버린다고 했어요.”, “일본 나빠요. 나도 일본 싫어요.”
내심 준비를 하고 학교에 갔지만 초등학교 1학년생들 입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나올 때는 솔직히 많이 당황스럽고 서운하기도 합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제 작은 딸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자주 이야기해주는데요. 2학기가 시작한지 얼마 안됐을 때 담임선생님께서 불매운동에 관한 말씀을 하셨답니다. 제 생각에도 학생들 또한 관심을 갖고 있는 일이라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생님과 아이들은 당연히 제 딸이 의식되었을 텐데 제 아이가 느꼈을 분위기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 만큼 속상한 것이 제 마음입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제 큰 딸도 학교에서 모둠 활동을 잘했다며 담임선생님께서 볼펜을 하나씩 선물해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아이가 일본제품임을 알아봤고 왜 일본 걸 주셨냐고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불매운동 전에 사놨던 거니까 그냥 받으라고 하셨지만 받지 않겠다며 아이들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선생님은 미리 사놨던 물건을 쓰고 안 쓰는 건 각자 알아서 생각할 문제니 받을 사람만 받으라고 하셨답니다.
복잡한 과거사 문제가 걸린 한일 양국의 사이가 쉽게 회복되지는 않겠지만 두 나라를 고향으로 생각하는 저에게는 이 상황이 빨리 좋아지길 바랄 뿐입니다. 양국 시민들끼리는 사이좋게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 울란바토르가 고향인 몽근졸씨 이야기
저는 올해로 강사활동을 시작한지 11년째 입니다.
요즘도 어떻게 하면 저의 고향인 몽골에 대해 그리고 이주민의 삶을 학생들에게 더 생생하게 더 재미있게 들려줄 수 있을지 고민을 합니다. 수업을 하다 보면 재미있는 질문들이 나올 때가 있는데요. 최근 다녀온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며칠 있으면 추석인데 한국은 가을에 추수를 해서 겨울 준비를 하지만, 유목을 많이 하는 몽골에서는 키운 가축을 잡아서 겨울 양식을 준비하고 가축들이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먹이와 땔감을 준비해요. 한국에서 땔감이라고 하면 나무를 생각하지만 몽골은 ‘가축 똥 말린 것’을 땔감으로 많이 써요. 그걸 몽골에서는 '빠스'라고 하는데요. 소똥, 말똥 중에는 말똥이 최~~~고로 좋은 빠스랍니다. 교실 안 아이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악! 똥냄새 날 것 같아요.” “그걸로 음식도 해요? 우엑~”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런데 초원의 풀을 먹고 가축의 몸에서 소화가 된 똥이 햇볕에 바싹 마르면 땔감으로 써도 풀 냄새가 나고 똥 냄새는 하나도 안나요. 화력은 또 얼마나 센데요.
“선생님, 그럼 사람도 깻잎이나 채소도 먹으니까 사람똥도 땔감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우하하~~” “아! 말도 안돼~.”
다 같이 배꼽 빠지게 웃으면서 ‘빠스’ 이야기와 제 고향 이야기를 나눴었는데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TV나 인터넷 등을 통해서 몽골의 전통문화를 접하기 때문에 아직도 모든 몽골 사람들이 게르에서 유목만 하고 산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사실 몽골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한국의 도시 생활과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것도 꼭 이야기 한답니다. 전통도 중요하지만 혹시라도 아이들이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도 제 역할이니까요.^^
◆ 마하누르에서 온 제니씨 이야기
저는 마다가스카르에서 한국에 온 지는 9년이 되었습니다.
2018년도부터 아시아인권문화연대(이하 연대)에서 강사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연대 사무실을 찾아왔을 때 이 곳이 왠지 모르게 안전한 곳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편안했습니다. 솔직히 강사로 활동하기에는 아직 한국어 발음이 좋지 않아서 한국어를 더 공부하고 다시 오겠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주민이 다 한국어 발음이 좋은 것도 아니고 한국어는 좀 부족하더라도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도록 하는 것도 좋은 교육이 될 수 있다.”는 말에 용기를 내어 활동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제가 들어오는 것을 본 한 아이가“선생님, 한국에 밥 먹으러 오셨어요?”라고 질문을 했어요. 그리고는 “우리 엄마가 아프리카 친구들은 가난해서 먹을 것도 없는데 그 친구들 생각하고 음식을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고 했어요.” 어린 아이가 한 말이지만 사실 어른들 중에도 아프리카에서 왔다고 하면 굉장히 불쌍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분들이 꽤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속상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제가 강사활동을 해야 하는 이유도 확실히 느껴져요. 연대에서 강사활동을 하면서 아프리카에 대해 마다가스카르 출신으로 당당하게 한국에서 이주민으로서 힘든 점, 어려움 점, 좋은 점 등 제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답답한 저의 마음도 많이 풀어졌습니다.
한 번은 아침부터 딸과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하필 그 날, 우리 딸 반으로 수업을 갔어요.
마치고 인사하려는데 갑자기 딸이 벌떡 일어나는 거예요. 몸을 S로 비비 꼬면서 말이죠. 큰 소리로 “엄마~ 오늘 (수업하고) 집에 언제 와요~?” 반 아이들은 제가 엄마라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는데도요. 저는 아이의 행동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상호문화교육 강사로 활동하는 것이 뿌듯하기도 해서 한참 동안 웃음이 났습니다.
저는 한국에 남편이랑 처음 들어오기도 했지만, 며느리도 처음이고 엄마도 처음입니다. 모든 처음은 두렵고 설레고 하잖아요. 강사활동도 그랬고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과 관계도 마찬가지였어요.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노력하면 좋아지더라구요.
“역시 노력은 행복의 비밀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음성에서 태어난 최선희씨 이야기
저는 주로 인권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항상 부족함을 느끼지만 다양한 소수자를 아우르는 인권 전반을 다루는 시간(자유학년제 수업)에는 혹시 무의식 중에 제 자신의 편견이 드러나지나 않을까 더 조심스럽습니다. 한 번은 초등학교 6학년 수업이 끝난 쉬는 시간에 정리중인 저에게 한 학생이 다가왔습니다. "선생님처럼 성소수자를 인정해 주는 사람은 처음이에요.”라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저는 그 학생을 쳐다보며 “그래?”하고 웃으며 나왔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잠자리에서 그 학생의 말과 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겁니다. 사실 내 스스로도 마음에 뭔가 명쾌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먼저 다가온 아이를 나도 모르게 모른 체 한 것은 아니었는지 아이에게 나의 무관심이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이와 무슨 말이든 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제가 한심스러웠습니다.
여러 해 동안 인권강사로 활동하고 있지만 때로는 나 스스로 가해자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무거운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나는 과연 차별에서 자유로운가?’교실에서 학생들을 만나면 인권이란, 인정할 수 있는 것과 인정할 수 없는 것으로 구분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인정하고 싶은 것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나누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교육도 교육이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성찰하면서 활동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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