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링크업은/링크업이모저모

과도기의 네팔 :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가는 험로

by 아연대 2010. 10. 7.

고팔 크리슈나 시와코티(Gopal Krishna Siwakoti)

이 글은 네팔의 정치적 격동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으로, 네팔에서의 민주주의 발전 과정, 시민사회의 참여 및 네팔의 정치적 구조 변화의 역학과 관련되는 문제들을 다룬다.

10년에 걸친 폭력 투쟁을 경험한 히말라야의 이 신생 공화국은 투쟁 후 발생한 조직범죄들과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분파 무장단체들과 함께 고밀도의 급속한 정치적 전환을 겪어왔다. 네팔의 과도기 현상은 평화로운 민중봉기를 통해 급진적인 정치적 변화를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독특한 사례 연구로 제시될 수 있다. 그 밖에도 이 글은 자생력 있는 과도 사법체계가 부재한 가운데 과거를 정면으로 다루는 데 실패한 결과도 다룬다.



네팔 근현대사 개관

네팔과 관련해서는 모순 아닌 것이 없다! 네팔은 바다가 없는 소국으로서 놀라운 지형적 다양성을 가진 나라이다. 네팔은 세계 최고봉을 자랑하는 산이 있는가 하면 아열대 호랑이 밀림이 펼쳐져 있는 남쪽 국경지대를 따라서는 고도가 해수면 수준으로 뚝 떨어지기도 한다.

모두 147킬로미터의 거리 내에서 일어나는 고도 변화이다. 이 나라는 아시아의 두 강대국, 중국과 인도 사이에 끼어 있다. UN과 국제사회가 네팔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있으나, 실은 정치적․경제적 영역에서 두 대국의 명시적 승인 없이 외부 세계와 접촉하려면 운신이 힘든 처지에 직면할 대가 종종 있다. 사실 알고 보면, 네팔은 어느 방향에서나 독립성을 협상으로 확보해야 하는 형편이다.

네팔의 어두운 봉건적 과거는 새 천년의 활기찬 정신과 충돌한다. 이 나라는 전통적으로 소수민족의 소외와 성차별 그리고 자유와 열린사회를 논할 여지가 없는 절대통치를 지지하는 케케묵은 카스트 제도 안에서 탄생했고, 지금도 그 때문에 파행을 면치 못하고 있다.

네팔은 2백40년간 우여곡절을 겪으며 가까스로 왕위를 유지해온 전제군주 국가였다. 그러나 폭력적인 마오이스트
Maoist 반란이 2006년의 평화적인 민중봉기와 혼합되어 왕정을 거의 다 무너뜨렸다. 네팔인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으로 비쳐지기는 하나, 10년 내전과 혹독한 정치적 체제 변화에 시달려왔다.

1743년 이전의 네팔에는 인구가 적은 부족국가들이 무수히 존재했다. 사회구조는 비교적 단순했고, 직업과 지위의 구분은 대체로 연령, 성별 그리고 군사적 능력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점차 인도-아리안 공동체들, 특히 오늘날의 인도 북부 출신 공동체들이 네팔의 구릉지대로 들어와 카스트 제도에 기반한 복잡한 사회적 분업 체계를 도입했다. 17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소국들이 힌두 왕들의 확고한 통제하에 들어가 있었다(Rose and Fisher, 1970, Bista, 1991).

18세기 중엽 고르카Gorkha라는 산악국의 야심 많은 왕 프리트비 나라얀 샤Prithvi Narayan Shah와 그의 계승자들이 고르카 왕국의 영역을 확장하여 오늘날 네팔이 창건하는 토대를 마련해놓았다. 넓은 지역을 병합하고 정치적으로 통제한 결과 토지세를 더욱 더 많이 징수할 수 있었으며 이는 이웃국가들을 침공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소국들을 통일한 이후 토지세 수입은 네팔 지배 계급의 주된 수입원이었다(Regmi, 1978).

1846년에 장가 바하두르 라나Janga Bahadur Rana가 네팔의 총리가 되었고, 그가 점차 권력을 장악하여 왕을 허수아비에 불과한 존재로 만들었다. 라나 정권은 외적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밀접한 관계를 발전시켰다. 영국령 인도에 대한 라나 정권의 정책은 화해와 생존 정책이었다.

라나 일족은 네팔인들을 영국군의 병력 자원으로 공급하는 데 동의했다. 그 대가로 영국은 그들에 대한 정치적 지지와 네팔 내정에 대한 불간섭을 보장했다
(Stiller, 1975). 라나 일족은 백 년 넘게 나라를 통치하면서 고도로 억압적인 국가 관료조직을 창설했고, 이 조직은 다른 사회집단들의 이해관계를 억압했다(Rose and Fisher, 1970).

1950년대에는 라나 체제에 대한 민중의 반대가 꾸준히 힘을 키웠고, 여러 정당과 정치조직이 창설되었다. 근대적 제도의 형태를 띤 관료조직과 더불어 다양한 정당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 구조와 계급 관계는 어떤 근본적 변화도 겪지 않았다(Blaikie et al, 1980). 판데이Panday(1999: 239)가 지적하듯이, 이 기간은 새로운 정치제도들이 미래의 방향을 제시할 뚜렷한 전략을 전혀 제공해주지 못한 채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 있었고, 결국 네팔의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1960년에 왕은 집권당 네팔국민회의Nepal Congress(NC)가 권한 남용과 부패를 저질렀고 무엇보다도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난하면서, 모든 정당을 금지하고 무정당의 판차야트Panchayat 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Rose and Fisher, 1970; Burghat, 1994).

무정당의 판차야트 정치제도의 도입으로 왕은 고위 카스트 계급과 지주 계급을 하수인들로 삼아 민간 행정조직, 군부, 의회와 사법부를 통제할 자신감을 얻었다. 이러한 정치 환경에서 네팔 국민들은 발언권을 상실했고, 1950년대의 민주주의로 확립된 국민들의 권리는 왕에 의해 폐지되었다.

이런 환경에 환멸을 느낀 대중 사이에서 소요가 점증했다. 그들은 판차야트 제도가 권력을 남용하고 있으며, 30년에 걸친 계획적인 개발과 외국 원조의 유입에도 불구하고 빈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Panday, 1999). 더욱이 이 제도하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거부되었고, 정치적 반대자들은 잔인한 취급을 받고 재판 없이 구금되기까지 했다.

억압적인 체제에 도전하기

단일한 중앙집권적 네팔국을 만드는 과정은 2백42년 전에 통일과 민족 형성이라는 이름하에 시작되었다. 네팔인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억압적인 국가 형태에 몇 차례 도전했다. 1990년에는 불법화된 네팔국민회의와 몇 개 공산당들이 합세하여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한동안 민간 소요를 거친 뒤 왕은 무정당의 판차야트 제도를 해체하는 데 동의했지만, 입헌군주의 지위는 유지했다. 다당제에 기초한 민주주의 회복에 이어 몇 개의 조직과 정당들이 등장했다. 여기에 더해 관료조직과 국가기구의 변화도 이루어졌다. 외국 원조와 민간 부문의 성장도 단기간에 상당히 증가했다. 개발 부문에서 국내 NGO들의 활동을 권장한 정부 정책은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NGO들은 1990년대 초기에 네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Seddon, 1994).

이 같은 많은 긍정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네팔은 다당제 정치제도를 회복한 지 10년이 지나서도 정치 안정을 경험하지 못했다. “우리는 정치적 단층선이 확장되면서 정치체계 전면facade이 네팔의 권위주의 통치와 전통적․위계질서적․반봉건적 사회구조의 역사가 지닌 무게에 짓눌려 무너질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판데이Panday(1999)는 설명한다.

민주주의가 회복되자 선출된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커졌다. 그러나 정당들이 반목과 분열에 빠져 민주적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러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뿐만 아니라 이 기간에는 부패 사건들이 급증하여 가치와 지도력의 위기가 심화된 것이 특징이다
(Seddon, 1994).

과거에 네팔의 통치체제에서 정치적 배제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헌법에 따라 치러진 선거 과정에서 투표의 60퍼센트 이상이 정부 형성 과정으로부터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1991년 헌법에는 중앙에서 지방으로, 다시 기층민중 수준까지 권력을 위임하는 규정이 없었다. 그것은 국가 예산의 40퍼센트만 중앙정부 밖으로 배분된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네팔은 의회가 12년 동안 세 번 선출되고 네 번 해산되는 특이한 상황을 겪었다.

이것은 통치가 지배 엘리트들의 자의에 심하게 휘둘리며, 그래서 국민 대표성이 매우 낮고 권력이 중앙집중화된 정치제체의 총리가 의회를 마음대로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과거에는 인구의 41퍼센트가 의회 의석의 84.9퍼센트를 차지하고, 인구의 58퍼센트는 불과 15퍼센트의 의석만 차지했다. 이 수치들은 당시의 정치 제도가 구조적으로 결함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법부가 더 강했더라면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회가 해산되고 그에 대해 법원에 소가 제기될 때마다 법원이 이전의 판결과 배치되는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에서 사법부가 약했다는 것이 잘 드러난다.

민주주의의 결핍을 경험한 일부 다른 나라에서는 정부가 개선 조치를 취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네팔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구조 자체가 결함이 있었고 부패, 정실주의 그리고 의회에서의 ‘뒷거래’가 성행했기 때문에, 그러한 환경에서 국민들이 점차 정당과 그 지도자들에 대해 믿음을 상실하게 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민주적 가치와 인권보장의 문화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점진적 접근방법을 넘어서는 체제의 대대적인 개혁이 불가피했다.

싸우기 위해 총을 들다

민주주의를 회복한 지 6년이 지난 1996년 2월 13일, 네팔 공산당(마오이스트, CPN(M))은 중서부 산악 오지에서 ‘인민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무장반란을 개시했다.

그들의 목표는 봉건제도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를 확립하여 새로운 민주국가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네팔인민전쟁은 그 레토릭에도 불구하고 계급전쟁은 아니었으며, 모잠비크의 경우와는 반대로 주민들을 구래의 종족 구분을 토대로 양극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젊은이들을 개별적으로 동원하여 그들에게 직업을 제공했는데, 이것은 여러 면에서 국외로 돈을 벌러 나가는 것에 대한
(떳떳한) 대안이었다. 빈곤에다 허약한 정부, 독재적 지배에서 민주적 지배로 실질적인 이행을 하지 못한 것, 그리고 카스트와 민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부재는 일정 기간 불안정을 가져왔고, 그것은 시간이 가면서 마오이스트 반군이 발호할 토양을 제공했다.

반란이 시작되었을 때는 그 심각성을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다. 반란은 급속히 확산되어 나라를 국가적 위기로 몰아넣었고, 당장은 끝이 보이지 않는 오랜 내전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이 전쟁이 국가나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마오이스트들은 좌절하고 실망한 젊은이들과 차별받는 빈곤층을 반란에 끌어들이는 데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투쟁으로 더 나은, 더 평등한 사회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던 사람들은 곧 실망하게 되었다. 결국 이 나라는 불법 감금, 고문, 강요, 유괴, 실종, 초사법적 살해의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졌고, 이미 만연된 가난과 불행에 의해 그것이 더 심화되었다.

그러는 동안 당시의 왕인 갸넨드라가 권력을 장악하여 2005년에 독재적 통치를 실시하면서, 마오이스트들의 이른바 ‘테러 행위’를 막는다는 미명하에 정당과 시민 사회조직들의 활동을 사실상 금지했다. 내전의 완충세력이었던 인권단체들도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시간이 가면서 반란은 격화되고 통제 불능이 되어 어느 쪽도 승리할 가능성이 없었다. 마오이스트들은 농촌 지역의 거의 80퍼센트를 장악했다고 주장하였고, 국가 행정 및 보안
(군대와 경찰) 조직 기능은 도시 지역과 지역 사령부 및 농천 지역의 일부 보안 기지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 나라에 두 개의 정부가 존재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농촌 지역은 국가의 행정, 사법 및 보안 조직 없이 마오이스트들의 통치를 받는 한편, 그보다는 낮은 수준의 국가 통치라는 이중 통치를 받았다.

내전은 네팔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인권침해가 만연하여 초사법적 살해, 신체 훼손, 협박, 모욕, 사회적 고립, 성별에 기반한 폭력gender-based violence, 유괴 및 아동들의 강제 징집이 여기저기서 발생했다. 이 내전으로 1만5천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평화재건부 자료).

이 분쟁으로 인해 수많은 가족과 개인들이 집을 버리고 탈출하여 비교적 안전한 지역 사령부가 있는 곳이나 안전한 도시 지역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 추산으로 약 1만 8천 명이 피난을 갔다고 하나, 노르웨이 난민평의회
Norwegian Refugee Council의 추산으로는 이 수치가 10만에서 20만 사이에 이른다. 카리타스 네팔Caritas Nepal에서는 피난민 숫자를 21만 4천 명에서 27만 2천 명 사이로 추산했다.

보호를 위한 비폭력 무기

2006년 4월 왕으로 하여금 직접 통치를 포기하게 만든 대중 운동의 성공에 이어 몇 달 동안 협상이 느리게 진행된 후, 당시의 7개 정당연합Seven Parties Alliance(SPA)과 마오이스트들은 2006년 11월에 역사적인 포괄적 평화협정Comprehensive Peace Agreement(CPA)에 서명함으로써 10년을 끌어온 내전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협정은 2005년 뉴델리에서 SPA와 마오이스트들 사이에 이루어진 양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양측의 내재된 관점과 이해관계의 영구적인 변화보다는 이해관계의 일시적 수렴을 대변한다. SPA와 마오이스트들은 네팔의 장래 제도들에 대해 관점이 서로 달랐고, 개별 정당들의 선거 이해관계가 점차 전면에 부상했다. 포괄적 평화협정 그 자체가 네팔 정치의 배제적 특징들을 변화시키거나 긴급히 요구되는 경제발전과 안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이 협정은 과도 의회와 정부의 구성 및 제헌의회(CA) 선거를 위한 길을 닦았다. 무기 관리에 관한 세부 협정에서는 마오이스트들이 자기편 전사들을 숙영지에 따로 입소시키고 그들의 무기를 UN 감독하에 폐쇄 보관하기로 약속했다. 네팔군은 대체로 병영에만 머무르기로 했다.

오랜 숙원이던 제헌의회 선거는 결국 2008년 4월 10일에 치러졌는데, 단순다수대표제와 비례대표제를 혼합한 방식의 선거제도를 채택했다. 2008년 5월 마오이스트들이 이끄는 새 의회가 2백 40년 된 구군주제를 폐지하기로 결정하자, 세속국가이던 세계의 마지막 힌두 왕국은 공화국으로 선포되었다.

불행히도 제헌의회는 아직 의미 있는 결과를 산출하지 못하고 있다. 2008년 4월 구성된 이후로 제헌의회가 안고 있는 특징적인 문제들은 무엇보다 견실한 대화 매커니즘의 부재, 부실한 업무 실행, 신뢰 구축에 대한 관심 부족 그리고 불투명하고 엘리트 주도적인 접근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숙영지에 머무르고 있는 반군 전사들의 통합, 국가의 연방구조 결정, 인권 기준의 설정, 정부 형태의 결정, 선거에서의 대표성 부여 방식, 자결
自決과 자치를 포함한 주요 쟁점들에 관한 타협안의 모색과 관련하여 핵심 정치 주체들 간에 나타난 분열은 계속 다음 단계들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과도 헌법에서 규정한 대로 1010년 5월 28일까지 새 헌법을 공포하기로 한 마감시한을 넘길 것이 거의 확실하다.

네팔 정당들의 활동은 의심, 정파적 이해, 선거구민들에 대한 신뢰 부족, 특히 지도부와 엘리트들에 의한 밀실 의사결정을 특징으로 한다. 당내 의견 수렴이 어렵다는 약점은 대다수 정당들 내의 기강 해이로 인해 더 악화되고 있다. 정치인들이 개별적으로 도발적 발언을 일삼고 개인적인 목표를 공공연히 추구하는 탓이다.

큰 난제는 국가와 정당들이 마데시Madeshi, 여타 다양한 소수 종족집단, 여성, 달리트dalits(불가촉천민) 기타 소외된 집단들의 요구에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 하는 데 있다. 다수의 소외된 집단과 지방 집단들이 등장하여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주류 정치 과정과 새 헌법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마데시들은 네팔 정치의 의사결정 과정에 자신들이 포함되지 않고 있는 데 대한 불만을 토로해 왔고, 토착 부족, 달리트, 장애자들과 기타 전통적으로 소외된 사회계층의 경우도 그와 마찬가지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공화국으로 가는 길

네팔의 제헌의회 선거는 평화 과정peace process으로 한걸음 크게 나아간 것으로, 연방제 민주공화국을 선언하고 헌법 기초起草 과정을 출범시키기 위한 길을 닦았다.

이 선거는 분명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네팔 공산당-마오이스트가 큰 표 차로 제1당으로 부상하여 제헌의회 의석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최대의 기성 정당들인 네팔 국민회의
(NC)와 네팔 공산당-UML(통합 마르크시스트-레니니스트, CPN(UML))은 참패하지는 않았지만 의석 비율이 낮아서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왜냐하면 양당의 의석수를 합쳐도 마오이스트들보다 적기 때문이다. 왕당파 정당들은 단순다수대표제(지역구) 의석을 한 석도 얻지 못하고, 비례대표 의석을 통해 간신히 새 의회에 발만 들여 놓고 있다. 제헌의회 선거는 광범위한 폭력 발생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평화롭게 치러졌다.

선거 이후 7월까지 권력 배분 협상이 몇 달간 계속된 뒤, 네팔 의회는 람 바란 야다브 박사
Dr. Ram Baran Yadav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푸슈파 카말 다할Pushpa Kamal Dahal은 네팔의 초대 마오이스트 총리로 임명되어 2008년 8월에 취임했다. 마오이스트들은 구 정당들이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국민적 열망에 정확히 부응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그들이 구사한 좀 더 수상쩍은 기법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카트만두의 정치놀음에 몰두하지 않고 일반 민중과 친밀히 접촉해 왔다는 사실을 최대한 활용했다. 선거는 너무나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던 네팔 국민들에게 발언권을 행사할 기회를 주었다.

투표 방해와 협박의 사례들이 있기는 했으나 사람들은 대거 투표장에 나와 투표권을 행사했다. 4월 선거에서 마오이스트들은 압도적 다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깨지기 쉬운 평화 과정을 주도하여 잘 마무리하라는 국민적 위임
委任을 새로이 확보한 것이다.

제헌의회의 첫 회의에서는 근 2백 42년 된 군주제를 폐지하기로 만장일치로 의결했고, 네팔은 세속적인 연방제 민주공화국이 되었다. 특히 타라이 지역Tarai region(네팔 남부 마데시의 거주지)의 지역 정당들이 등장한 것도 새로운 정치 지형의 한 면모였다. 이 마데시 정당들은 제헌의회 선거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어 제헌의회 내에서 의미 있는 대표성을 확보했다.

제헌의회는 놀랍도록 포용력 있는 기구이며, 과거의 다른 어떤 의회보다도 네팔의 카스트, 소수민족, 종교 및 지역적 다양성을 더 많이 대표한다. 의원들의 3분의 1이 여성으로 채워지면서, 이 나라는 여성의 대표성에 관한 한 일거에 지역의 지도적 국가가 되었다. 마데시 자나디카르 포럼Madheshi janadhikar Forum(MJF)은 자신들이 마데시들의 불만을 막연히 대변하는 단순한 간판 이상이며, 어쩌면 앞으로도 상당 기간 표를 동원할 수 있고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부각시킬 수 있는 자생력 있는 정치조직임을 입증했다.

적자생존

정치적 배제(특정 집단을 정치 과정에서 배제하기)는 대체로 지난 과거의 문제이다. 더 큰 문제는 지방의 각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정치적 공백인데, 이는 부실한 개발에서 나온 공백이고, 전국 및 지역 수준의 지도부가 아무런 정당성을 얻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공백이다. 격동의 몇 년을 거치면서 마오이스트들은 네팔 선거민주주의의 가장 취약한 고리가 지역 격차, 카스트 격차 그리고 소수민족 격차임을 이해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부문이 반란의 기운이 가장 뜨거운 곳이다. 또한 마오이스트들이 동원하는 인구의 대부분은 어떤 주요 정당도 그들을 수중에 넣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있다. 지난 15년간은 또한 선거만으로는 민주주의와 포용을 이루어내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국가에 의한 불의뿐만 아니라 시장에 의한 불의까지 온갖 형태의 불의를 우리 시민사회가 비판할 필요가 있다.

지난 60년에 걸친 빈약한 몸의 정치body politics 기간 동안 네팔에서는 일시적이나마 독재적 통치를 대신해 입헌 군주제와 다당제 민주주의가 한 번씩 등장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유는 종종 정치적 무정부 상태와 대중적 환멸로 전락하곤 했다. 그것은 정당들과 군주 사이의 끝없는 권력 투쟁 때문이기도 했고, 사회경제적 발전을 계속 등한시한 탓이기도 했다.

1990년에 이루어진 비렌드라 왕과 정당들 간의 타협은 영국식 입헌군주제와 의회민주주의를 공식화하는 데 기여했다. 서양의 자유 애호가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네팔이 마침내 민주국가가 되는 문턱을 넘어선 것이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2005년 2월 1일, 갸넨드라 왕이 자기 아버지가 1960년에 한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그 일련의 사태는 자유 애호가들에게 충격을 주었는데, 특히 이때는 서구 세계가 자유를 해외로 적극 확산시키고 있을 때여서 더 그랬다.

현행 제도들은 근본적으로 배제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네팔이 채택한 다수결주의적 제도들은 다문화 사회에서가 아니라 다수파 사회에서 효과를 발휘한다. 다수결주의적 제도들은 계급 분열을 심화시키며, 네팔에서는 여기에 카스트 힌두의 가치와 혼입되어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효과를 낳는다.

헌법이 일정 집단들의 이해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그 집단의 개인들은 다른 국민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법의 보호를 향유한다. 현재의 정치구조에 대해서는 그것이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전제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부터 다중언어 정책을 부당하게 폐기했으며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는 점에 이르기까지 얼마든지 반대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처럼 현행 제도들이 보장하지 못하는 목표들을 이루기 위한 실용적 모델의 하나가 연방제도라고 믿는다. 그러한 제도는 국가 행위와 지방분권화 간에 올바른 균형을 제공하여, 문화적 자율을 통한 포용을 가능하게 하고 소외된 집단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한편, 전 국민의 이익을 더 잘 반영하는 공공정책을 마련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연방제에서는 민족 갈등에 대한 더 나은 관리, 더 효율적이고 민의에 반응하는 행정, 지역적으로 균형 잡힌 경제발전, 더 발전된 지방분권과 지역 수준의 다양한 실험을 도모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인권: 비인도적 만행들

10년에 걸친 마오이스트 반란과 무자비한 왕실과 군부의 진압 활동으로 1만 5천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의 피난민이 마을을 떠났으며, 이전의 모든 확실성이 뒤집혀버렸다. 이 나라는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려고 여전히 몸부림치고 있지만,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여전히 처벌받지 않고 있다는 것이 현재 네팔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다.

2006년 4월의 봉기는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와 평화의 공간을 창출했지만, 오래전부터 약속된 진실과 화해 위원회와 실종위원회가 구성되지 않고서는 평화 과정을 낙관할 수 없을 것이다. 경찰, 군대 그리고 마오이스트들은 과거에 초사법적 살해, 유괴, 고문과 실종이 일상적으로 저질러질 때, 모두 인권 규범을 위반하였다.

그러나 단 한 명의 피해자나 생존자도 명목적인 사망 위로금 이상의 피해배상이나 법적 구제를 받지 않았다. 정치적 편의의 제단에서 사법절차를 희생시키려는 시도들이 있지만, 그것은 네팔의 통치 체제에 특유한 불처벌
impunity의 문화를 더욱 고착화할 것이다. 군부는 범행자들을 민간 법정에 넘겨주기를 주저하고 있고, 마오이스트로서 잔학행위를 저지른 자들도 체포되지 않고 있다.

중대한 인권침해자들이 영예로운 승리자가 되었다. 그 잔학행위들을 조사하여 진실을 밝히고 궁극적인 화해를 위한 사법적 정의를 통해 평화를 진척시킬 기구들을 만들어야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정의실현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승리자들’은 그 구성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고 있다.

네팔의 끔찍한 인권침해 기록이 그나마 의미가 있다면, 그것이 활기찬 시민사회로 하여금 모든 학대행위에 대한 면밀한 감시를 계속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지금은 ‘인권수호자
Human Rights Defender’라는 흰 글귀가 쓰인 푸른 재킷을 착용한 자원봉사자들을 네팔의 오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작업이 결실을 맺을지 여부, 그리고 인과응보적 정의의 제도화가 불처벌의 문화를 종식하는 데 성공할지 여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평화 과정과 시민사회의 역할

전쟁과 평화의 역사는 시민사회가 평화 과정을 향상시키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심할 바 없이 분명한 점은, 평화를 창출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시민에서부터 안보관계자들과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주체들이 여기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시민사회는 무기 관리와 동원해제가 큰 관심사인 갈등전환
conflict transformation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평화학자인 귄터 배힐러Guenther Baechler는 다각적인 외교 틀 안에서의 강력한 시민사회는 갈등전환과 평화구축에서 핵심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말한다. “강력한 시민사회는 건전한 사회조직의 보증인, 곧 내전 해소를 지지할 수 있는 자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다”(Baechler, 2005: 4).

그러나 네팔의 평화 과정에 대한 시민사회의 참여는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국가가 평화 과정에 공중이 참여하도록 권장하는 노력을 진정으로 기울이기는 매우 어렵다. 실질적으로 말해서 평화 유지는 무장 반란 투쟁을 종식시키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이를 넘어 투쟁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고 평화 전환을 촉진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정치적․사회적 전환 과정이다. 왜냐하면 거버넌스, 안보, 개발, 인권 정책과 실천상의 구조적 변화에 집중하면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Barnes, 2002). 이 점에서 네팔의 평화 과정을 민주화하는 데 대한 시민사회의 기여도는 중차대하다(Upreti, 2006).

시민사회조직들(CSOS)은 네팔의 정치사에서 인권을 수호하고 민주주의를 신장하는 데 있어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1990년 이후 등장하여 성장해온 NGO들은 달리트, 여성, 소수민족, 기타 소외 집단들의 의식을 제고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수호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어서 핵심 역할을 했다. 그 의식의 힘은 2006년 4월 네팔에서 독재 체제에 반대하는 민중운동으로 나타났다.

몇 달 후 정당 지도자들과 간부들이 나서서 시민사회조직들과 손잡고 네팔에서 군주제를 타도하였다. 2006년 4월 네팔 국민들은 투쟁에서 승리했고, 왕은 퇴위하고 다당제 민주주의의 회복 작업이 진행되었다. 분명 시민사회는 갈등전환과 평화구축 과정에서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대중과 대화를 통해 국민들의 관심사를 제고하고, 정치개혁을 세부적으로 설명하며, 평화회담과 협상을 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대중 회합과 집회를 힘써 조직하여 이뤄낸 결과이다
(Dahal, 2005; Upreti, 2006).

시민사회는 부단한 노력을 통해 UN 인권고등판무관실(OHCHR)이 네팔에 사무실을 두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인권고등판무관실은 인권 보호에 큰 역할을 하면서 네팔 내에서 그들이 유능하고 헌신적이며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점을 언급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UN은 상당히 관료적이어서 그들이 무기와 군대 관리에 개입할 때는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기와 군대를 관리할 때는 관료적 절차와 관행이 전환 과정을 지연시키거나 방해하지 않는지 부단히 감시할 필요가 있다. 일단 UN이 무기와 군대 관리에 개입하면 모든 주체들의 협력과 지원이 있어야 그 책임을 순조롭게 완수할 수 있는데, 여기에 시민사회가 건설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네팔의 평화 과정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면서 UN의 무기 관리를 지원하고 있는 몇몇 국제적인 쌍무적․다자적 기관들이 있는데, 시민사회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들과 만족스럽게 협력해왔다.

시민사회조직들이 이 나라에서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의 실현 시도들을 촉진하고 지원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종종 수행해왔다는 사실은 하나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불행히도 많은 나라에서는 갈등 후의 상황에서 시민사회가 약하고, 조직화되어 있지 않고, 독립성이 결여된 경우가 흔하다.

이에 반해 과거의 인권침해 사례들에 대해 모종의 책임을 묻겠다는 결정이 내려진 네팔에서는, 인권 공동체와 조직화된 생존자 단체들이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과도 정부들로 하여금 행동에 나서도록 압력을 가해왔다. 다양한 국적의 인권 활동가들도 갈수록 정부에게 과거와 정면으로 맞서도록 추가적인 압력을 가하는 한편, 정부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과도적 이행기 정의실현에 관한 전문지식을 제공해주고 있다.

시민사회 자체도 과거의 인권침해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사회의 여러 계층 사람들을 여기에 참여시키고, 이행기 정의실현의 경험에서 배운 교훈을 더 많은 국민들에게 확산시키는 데 있어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

빈곤의 정치

인권, 자유, 정의에 대한 중대한 침해의 의미도 지니는 빈곤 문제는 네팔에서 현재 진행되는 정치적 담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발전 우선과제, 정책 및 전략은 관료적 관점에서 개발되어왔지만 그것은 결함이 있는 접근방식임이 드러났다.

왜냐하면 빈곤을 해결하려는 수십 년간의 시도들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난 50년간 빈곤 감소를 위한 정책, 프로그램, 전략들을 관장해온 비효율적인 정치․사회제도의 결과이다. 그러나 빈곤은 정치적 문제라고 보아야 하며, 어떤 정치적 해법이 필요하다.

빈곤은 여성, 달리트, 소수민족 집단, 장애인, 기타 불우한 집단들을 소외시키는 네팔의 사회정치적 구조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이런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기술적 해법은 “두통을 복통약으로 치료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빈곤 해결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접근을 보장하는 민주적 거버넌스
(정치 체제)를 필요로 한다.

덧붙이자면, 빈곤을 줄여나가는 데 있어 국제기구들의 역할은 효과적이지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빈곤을 사회정치적 문제로 보기보다는 기술적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국제기구들의 원조 행정은 상명하달식에다 기술 중심적인 것처럼 보인다. 정부의 빈곤 감소 전략 문서Poverty Reduction Strategy Paper(PRSP) 자체가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작성되고 있다.

PRSP는 국민들과 협의 없이 개발되었다. 마찬가지로, 세계은행은 일부 시민사회조직들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정부로 하여금 빈곤 경감 기금을 창설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힘의 법이 법의 힘을 이길 때

선거도 성공적으로 치렀고 휴전도 지속되고 있지만 네팔의 평화과정은 이제까지 겪었던 것 중 가장 엄중한 시험에 직면하고 있다. 포괄적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협정의 준수 여부를 감독할 어떤 감시 체제도 마련되지 않았다.

그 결과 포괄적 평화협정 조항들을 위반한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했지만 누구도 전혀 처벌받지 않았다. 정치적 합의를 산출한다는 미명하에 범죄자들을 사면해주다 보니 법치주의의 기본 원리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선거가 끝난 지 20개월이 지나서 헌법 기초 과정이 마침내 진행 중이지만, 평화협정의 주요 부분들은 여전히 이행되지 않고 있다. 포괄적 평화협정에 규정되어 있는 과도적 위원회들 대부분은 아직 구성되지 않았다. 불처벌이 만연해 있고 공공 안전은 놀라울 정도로 취약하다. 평화협정 과정의 저변에 깔려 있던 합의는 낡아가고, 당사자들 간의 관계는 갈수록 대립적으로 되고 있으며, 협정의 근본 요소들이 도전받고 있다. 내전 후의 조직범죄와 폭력이 사회를 멍들게 하는 가운데 법과 질서에는 눈에 띄게 공백이 생겨나고 있다.

마오이스트들이 이끈 행정부의 집권 9개월은 답답한 것이었고, 논란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정부의 업적도 무색해졌다. 마오이스트들의 장기적인 의도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그들의 강경 전술은 여전히 인민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하는 혁명 전략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오이스트들이 권력에서 스스로 물러나고 2009년 중반 새 연립정부가 구성된 뒤에도 연립 파트너들 사이에 힘과 뜻을 합치려는 노력이 거의 없으며, 야당인 마오이스트들은 조직이나 정치면에서 지리멸렬한 상태에 있다. 기성 정당들도 그들의 빈약한 실적을 만회하면서 대표성을 제고하고 유권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개혁의 필요성을 아직 절감하고 있지 않다.

마오이스트들과 네팔군 사이에서 높아가는 긴장은 안보 부문의 미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연방제 실시와 같은 문제들은 치열한 논쟁을 유발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전들을 해결하는 것이 네팔 지도자들의 업무이기는 하지만, 국제사회도 평화 과정의 취약성을 인식하고 그 과정을 고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국제적 주체들은 평화를 증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지금은 모든 당사자들에 대해 자신들이 약속한 사항들을 준수하도록 부단한 압력을 가하고, 스스로 평화에 대한 위협에 대처하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다. 평화협정의 일부 조항들이 유명무실해지도록 방치하면 전체 과정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네팔의 정치 지형은 불가역적으로 변화되었다. 마오이스트들은 2008년 4월의 제헌의회 선거에서 당당히 승리함으로써 지하 반군에서 공개적인 정치로 이행하는 데 성공했다. 네팔 국민들은 지속적인 평화를 확립하고 변화를 이루어내면서, 선거를 통해 모든 정당에게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했다.

특히 빈곤, 차별, 배제, 불처벌, 자원에 대한 접근 제한, 정체성의 인정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봉건적이고 배제적이며 부패한 정치가 현재의 정치적 관행 속에 남아 있기는 하나, 정치의 형태는 이전과 다른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새로운 제헌의회는 네팔이 이제까지 선출한 기관들 중 가장 포용적인 기관으로, 많은 카스트 집단, 소수민족 집단 그리고 지역 공동체들이 과거의 의회들보다 더 많은 대표성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이제는 여성들이 의석의 3분의 1을 점하게 되어 네팔은 역내의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앞서게 되었다.

그렇지만 네팔 정치의 교착 상태는 발전적 변화의 추구에 계속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국민의 위임 사항은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는 단일 정당이 행정을 담당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당들이 협력하여 평화와 변화의 길로 나아가라는 것이었다.

네팔 국민회의와 네팔 공산당-UML
(통합 마르크시스트-레니니스트)은 선거가 끝나면 결과에 관계없이 합의와 협력을 기초로 일하겠다는 분명한 약속을 내걸고 선거에 임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를 주저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타협을 위한 카드일 수도 있겠으나, 평화 과정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낮은 대중적 신망을 더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

건강한 토론과 다양한 정책 입장이 제시되는 것이 바람직한 입헌 과정에서, 그들은 건설적인 참여자로 여겨지기보다 심술궂은 훼방꾼으로 비춰질 위험을 안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대표성을 제고하기 위한 내부 개혁을 미루면 미룰수록, 환멸을 느낀 이전 지지자들과 다시 연결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마오이스트 지도부도 내적으로 자신들의 강력한 지위를 지렛대 삼아 폭력과 강요의 정치를 단호히 배척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지 못했다. 그 운동 내에서도 많은 의문이 제기된 ‘평화적 해법’ 전략은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내부의 논쟁과 외부의 압력에 직면하고 있다.

안보 부문이 중대한 문제로 남아 있다. 두 개의 상비군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은 내재적인 불안정 요인이다. 초기의 마오이스트 정부가 네팔군
(NA)과 그들 자신의 군대를 모두 지휘하는 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고 그것은 타당한 우려였다.

그러나 안보 부분의 장래를 논의하기 위한 모든 제안에 한사코 저항하면서 2년을 허비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야기한 것은 네팔군과 주류 정당들이다. 네팔군은 어떤 의미 있는 민주적 통제의 바깥에 놓여 있고, 따라서 순조로운 권력 이양을 보장할 견제와 균형이 없는 실정이다.

안보 부문 외에도 다른 화급한 난제들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 법과 질서가 엉망이며(특히 일부 타라이 지역에서 그러하다), 불처벌의 문화도 예전 그대로이다. 내전 중에 몰수한 토지를 돌려주는 문제와 약속한 토지개혁을 입안할 위원회를 설치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아직 진척이 없다. 평화를 확보하려면 지역과 마을 수준에서 시행될 조처들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지금까지는 지방정부의 초보적 요소들을 재확립하는 데 관한 합의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

국민들의 운동이 위임해준 신속하되 부드러운 체제 이행은 독재적․봉건적․중앙집권적․차별적 정치 거버넌스 체계를 민주적․포용적․분권적 체제로 바꿔나가는 것이다. 네팔의 정치 경제가 지난 수년간 급격히 변하기는 했으나, 이 나라는 정치․사회․경제 제도를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쪽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그들의 지속적인 투쟁에도 불구하고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거버넌스 체제는 네팔 국민들의 삶 속에서 아직 구현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심각하게 토의되는 문제는 인권친화적이고 포용적이며 참여적인 민주헌법을 공포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대략 1만 9천 명인 이전 마오이스트 전투원들의 미래 문제와 그들의 네팔군 내 통합, 대표성 모델
(지역구와 비례대표제의 선거 형태)의 결정, ‘새로운 네팔’을 재창조한다는 숭고한 꿈의 프로젝트 속에서 자결권을 실효성 있게 구현한다는 취지에서의 연방구조와 같은 쟁점들을 원만하게 해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네팔은 정치적으로 말해서 민주주의라는 장밋빛 길을 향해 가고 있다는 국제사회에 널리 퍼진 전망은 위험할 정도로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기는 하나, 빛나는 미래는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망으로서 남아 있다.

네팔은 현재 과거로 퇴행하는 움직임의 가장자리에서 비틀거리고 있다. 국제적인 관점의 렌즈를 통해 네팔을 ‘빛나는 민주주의’로 성급히 재단하는 것은 하나의 착시에 지나지 않는다. 허약한 민주주의가 과거로 회귀하는 딱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네팔은 앞으로 수십 년간 값비싼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뿐 아니라 세계무대에서까지.

※고팔 크리슈나 시와코티는...

철학박사(PhD). 1987년부터 현재까지 INHURED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INHURED(International Institute for Human Rights, Environment and Development: 인권, 환경과 개발을 위한 국제기구)는 네팔 최초의 국제적 인권단체이다. 시와코티는 1994년부터 현재까지 국가선거감시위원회(NEOC) 사무총장직을 수행해오고 있다. 특히 2008년의 제헌의회 선거에서 국내외 선거감시인단의 활동을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국제선거감시인단의 일원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선거감시인들을 훈련시키는 활동도 벌이고 있다. 2009년부터 현재까지 아시아태평양난민인권네트워크의 공동회장으로 활동하며 난민들의 인권옹호에도 힘쓰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