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사망한 노동자의 가족 중 열두 가족을,
지난 2006년 7월부터10월까지 찾아다니며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가족들 가슴에 담긴 애절한 이야기를 <꿈 그리고 악몽>으로 엮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며 후원금이 모이기 시작하여,
지금 진행하고 있는 네팔장학사업의 종자돈이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마음을 보태고 계신 덕에 2010년 6월 현재 모두 24가족 50자녀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사망한 네팔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우리는 누구도 쉽게 꺼내 펼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시작하려 합니다. 우리의 이웃이었지만 이방인의 삶을 살다가 한국땅에서 생을 마친 그들, 그리고 그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외국인 이주노동자라 부릅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존재를 몰랐던 20년쯤 전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이방인으로 주위를 맴돌았을 뿐 우리네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어떤 이는 쓸쓸함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찢겨진 몸과 마음을 안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하지만 그나마 살아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시아인권문화연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여년 전부터 한국에서 일하다 사망한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는 80여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그 중 언제, 어떤 사고로 사망했는지 파악되는 사람은 60여명 남짓합니다.
죽음을 둘러싼 기본적인 정황조차 파악되지 못한 스무 명 가량의 사연은 알 길이 없습니다. 한 나라의 사망자 수만 보더라도 이러한데 한국에서 이주노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전체 이주노동자는 얼마나 많을까요. 가슴이 메어 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일하다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는 여정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심란하고 두려웠습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잊혀진 존재였던 그분들을 찾아나서는 여정을 통해 죄스러운 마음을 떨쳐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을 만날 때마다 어찌할 수 없는 난망함이 더해져 되돌아오는 발걸음은 항상 무거웠습니다.
이주노동자의 죽음에 무심한 사회
2006년 7월 8월, 네팔의 하늘은 아침에는 햇살을 강렬히 비추다가 오후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장대같은 비를 뿜어 댑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상처를 되새겨야 하는 사망자 가족들과 그런 마음을 헤집어 기록해야만 하는 복잡한 심사를 알아서였을까요. 인터뷰 하는 기간 동안 네팔 하늘은 우리를 시험이라도 하듯 뜨거운 햇살과 장대비를 번갈아 내려주었습니다.
여정의 시작은 카투만두에서 버스로 반나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부투월에서부터였습니다. 송구하고 조심스런 마음으로 시작한 첫 방문, 하지만 의외로 우리를 따뜻이 맞이해주는 가족들 덕분에 순조롭게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후의 인터뷰에서도 사망자 가족들은 돌아온 혈육을 반기듯 우리를 맞이해 주셨고 기꺼이 마음 한 켠을 내어주는 데에 인색하지 않으셨습니다.
구구절절한 아픔과 실낱같은 희망이, 죽어서도 잊지 못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혹여나 무심히 옮겨진 활자 뒤로 묻혀버리지는 않을까. 그러나 기록으로나마 되살아나 가족들의 외로운 기억이 조금 따스해질 수 있기를 바라며 적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칠 때마다 그분들의 소중한 마음을 잘 전하기 위해 내용을 되새기고 얼굴을 떠올리며 우리들은 여정을 시작할 때의 다짐을 되새기고는 했습니다. 우리는 이주노동자의 죽음을 통해 누구에게나 다르지 않은 삶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이주노동자의 죽음'은 한국땅에서 이미 낯선 일이 아닙니다. 여수의 보호소에서 열 분의 목숨을 앗아간 화재참사가 일어난 지 불과 석 달, 참사가 발생하고 며칠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열악한 이주노동의 현실에 대한 기사들이 다투어 쏟아져나오기도 했습니다.
불이 나도 철창문을 열어주지 않는 보호소에 갇혀 죽어간 그들의 절규에 우리 사회는 때늦은 반성의 고삐를 다잡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참혹한 '떼죽음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모두에게 잊혀져버렸습니다. 장례는 쓸쓸히 치러졌고 살아남았지만 더욱 고통스러운 부상자들은 떠밀리듯 대한민국 땅을 떠났습니다.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키며 한 민족으로 살아왔다는 믿음 때문일까요. 의지의 선택이건 불가피한 질곡이건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의 텃세와 장벽은 무척이나 단단하고 높기만 합니다.
구호처럼 '다문화'가 범람한 지도 벌써 몇 년째이고 '이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이주민 100만명 시대가 온다는 등의 기사를 자주 마주치지만,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우리의 강고한 편견과 대면하게 만드는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하여 아무도 반기지 않는 땅에서 때로는 목숨을 걸고 일해야만 하는 것이, 여전히 바뀌지 않은 이주노동자의 현실입니다. 체류 자체를 불법으로 몰아 범죄자 취급하고, 사람이 죽어도 그저 목숨값을 계산하고 사건을 '처리'하기에만 급급합니다. 값을 치르고 나면, 한 켠이 뻥 뚫린 가족의 무너진 가슴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국인이고, 또 그들은 이주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제도와 법률을 뛰어넘고 피부색과 민족을 넘어서는 보편의 인간애 정도만이라도 되새기자고, 인간의 기쁨과 슬픔은 다르지 않다는 최소한의 공감대를 마련하는 일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말입니다.
가족의 생계를 양어깨에 걸쳐메고 발 디딘 낯선 땅에서, 아빠가 남편이 아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황망한 죽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시간의 한 가운데를 그들은 지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몇 해씩이나 얼굴 한 번 마주하지 못하고 살았던 가족의 죽음 후에 남겨지는 것은 결국 산 사람의 삶입니다. 웃고 울고 사랑하고 살아가는,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잠을 자는 그저 일상이기도 합니다.
한국으로 떠나보낸 가장을 잃고 어렵사리 생활하면서도 남겨진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에게 삶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질곡이지만,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희망은 호흡처럼 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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