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시아인권문화연대/소소하고 다정한 아연대 소식

고 박완서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by 아연대 2011. 1. 22.


오늘 새벽 박완서 선생님께서 귀천歸天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단체 운영위원으로 함께 활동하고 계신
여운 김광하 선생님의 빙모이시기도 한 박완서 선생님은

음으로 양으로 우리 활동을 많이 지원해 주셨습니다.
지난해부터 담당암으로 고생하신다는 소식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계시다는 말씀에 안도하곤 했는데

오늘 새벽 나리는 눈 속에 잠들 듯 오신 자리로 되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늘 따뜻한 어른이셨던 박완서 선생님, 하늘에서도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아래 덧붙인 글은, 꼭 십년 전에 선생님께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활동하는 이들을 격려하며 써 주신 글입니다.
작고 가난한 단체에서 여쭌 글을 쓰시느라
큰 언론사 출판사에서 요청한 글을 다 물리쳤다며
먼 여행길에 나서는 새벽에 잊지않고 보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많은 분들과 함께 추억하기 위해 여기 다시 올립니다. 



마음으로부터 감사를 전하며...

60년대 초 골목이 좁은 한옥동네에 살고 있을 때였다. 그 골목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홀어머니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공부 잘 하기로 소문난 그 집 큰 아들이 미국유학을 갔기 때문이다. 맨주먹으로 유학을 가서 명문대학에서 박사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어머니의 자랑이 긴가민가했었는데 그 자랑을 뒷받침하듯이 어머니 생신날 100달라 짜리가 든 편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동네사람들이 그 100달라라는 큰돈을 구경하려고 모다 그 집으로 모여들었다. 그때 동네 사람들은 머리만 좋을뿐 아니라 효성도 지극한 아들을 둔 어머니를 선망하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지만, 은연중 유망한 약소국 청년에게 공부도 시켜주고 돈도 벌게 해 주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존경과 친밀감을 품게 된 것도 잊을 수 없다. 공부하랴 돈 벌랴 그 청년이 얼마나 고달픈 유학생활을 했을지를 요새처럼 호화 유학이 성행할 때 돌이켜보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나, 그때만 해도 뜻이 있고 건강만 따라준다면 맨주먹으로도 유학이 가능할 정도로 미국이란 나라는 후진국 유학생들에게 장학금과 일자리 등 다양한 혜택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인심 후한 나라였다.

그 후에도 고급인력이 광부가 되어 또는 간호사가 되어 서독으로 외화벌이를 나가야 할 만큼 우리의 가난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국내에서 받은 것보다 높은 수준의 임금을 송금했을 뿐 아니라 능력에 따라서는 거기 남아 공부를 계속할 수도 있었다. 광부가 박사가 되기도 하고 간호사가 화가가 되기도 했다. 국가도 사람처럼 고립되어서는 살수 없는 게 세계화된 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도 이제 선진국 노릇을 해야 한다. 가난만 벗어났다고 선진국이 되는 건 아니다.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아야 한다. 가난보다 더 부끄러운 건 도움을 받고 갚을 줄 모르는 배은망덕이다. 반드시 갚되 도움을 받은 강자한테가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다른 약자한테 라야 한다는 게 은행 빚과 다른 인도적 빚의 특징이다.

우리나라로 돈 벌러 온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과 때로는 가혹행위까지 보고되는 이 부끄러운 세상에 그래도 어딘가에 그들을 도웁고 고충을 들어주려는 따뜻한 손이 숨어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우리의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탕감해주는 그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고 싶다.


<『개밥에 도토리』(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 옛 소식지) 에 실었던 선생님 글을 다시 올리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