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아우성, 아우성, 아우성……
UN인종차별특별보고관 방한을 준비하고 떠나보내며
이 완
10월 6일 기자회견을 끝으로, UN인종차별특별보고관 일행의 한국 방문조사가 끝났다. 이들은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이름만 들어도 멀어 보이는 케냐와 스위스로 돌아갔다. 그의 귀국과 동시에 나에게 물려졌던 공식적인 재갈도 풀어졌다.
10월 4일 안산, UN특보 일행이 도착하기 한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해서, 인터뷰 장소로 올라갔다. 주로 캄보디아 출신 농업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지구인의 정류장’에는 아우성이 가득했다. 농업 이주노동자 2명을 인터뷰하기로 하고 찾아갔는데, 적어도 50명쯤 되어 보이는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이미 쉼터를 발 디딜 틈 없이 메우고 있었다. 쉼터는 답답함을 넘어 폭발할 듯한 분위기였다. 이 답답함은 단순히 사람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명 한 명이 밤을 새워도 모자랄 만큼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정리하지 않으면 인터뷰와 조사가 이뤄지기 힘들 것 같았다. 그들의 의기를 꺾어 놓아야 했다.
“UN인종차별특보는 여러분의 개별적인 임금체불, 직장이동 등의 문제를 당장 해결해 줄 수 없으며 그럴 권한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처한 여러 어려움들이 각자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정된 시간 동안, 개별적인 문제들을 이야기 하는 것은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겪는 여러 문제들을 잘 설명해 주시면, 특보는 이런 내용들을 정리하여 내년 6월에 대한민국 정부에 공식적인 권고를 할 것입니다.” 몇몇은 이 말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쉼터를 나갔다. “물론 대한민국 정부는 UN권고에 대해 대답은 해야 하지만, 조치를 취할 법적 의무 또한 없습니다.” 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UN특보 일행이 도착하자 대표로 뽑힌 몇몇 캄보디아 출신 노동자들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사진과 동영상을 통해서도 아우성이 시작되었다. 술 취한 사장의 폭행을 피해, 사장이 못 들어오게 문고리를 잡고 울고 있는 캄보디아 노동자, 화장실이 없어 일주일씩 볼일을 참다 참다 비닐하우스 사이에서 일 년 가까이 볼일을 해결해야했던 여성 이주노동자. 이 여성 이주노동자는 고용지원센터에 직장을 바꿔달라고 신청했지만 처음에는 거절당했다. 고용지원센터에서는 화장실의 유무는 직장이동 규정 사항에 없다고 했다. 또한, 한국인들로부터 일상적인 인종차별을 당했냐는 질문에, 쉬는 날이 없어 외진 농장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하는 이주노동자. 사실은 일상적인 차별을 당할 기회조차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었다.
UN특보의 방문 사실을 통보받은 각 시민사회단체는 약 5개월 전부터 UN인종차별특별보고관의 방한에 따른 시민사회공동사무국을 꾸리고 준비에 들어갔다. 특보에게 전달할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인종차별 상황 보고서를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준비했다. 특보가 방한한 9월말부터 10월초 활동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정부기관들을 순차적으로 방문 및 인터뷰한 특보 일행은 NGO면담, 그리고 지역을 돌며 피해자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간, UN특보방한을 준비한 활동가들은 한국사회의 인종차별과 착취라는 부끄러운 속살을 온전히 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와 동시에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과 미안함도 함께 커졌다. 선상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폭행을 당해 숨진 인도네시아 어업노동자 사례, 그리고 비슷한 환경에 놓인 베트남 어업노동자들에게서 듣는 선상에서의 폭행과 폭언 등 일상적으로 이어지는 차별사례들을 우리 안에서 해결하지 못해, 다른 곳에 알리고 해결해 달라 이야기해야 하는 자괴감 또한 들었다.
10월 6일, 5페이지에 걸친 한국의 인종차별 상황에 따른 예비 권고 형식의 기자회견문에는 한국의 인종차별 상황이 조목조목 적혀 있었다. 미디어와 언론에서의 인종차별, 일상적인 인종차별적 행위와 발언, 그리고 농업, 어업, 제조업 이주노동자, 난민, 이주아동, 결혼이민자 등 차별받는 주체들의 문제들이 나열되었다. 특보는 내년 6월 인권이사회에서 한국정부에 정식 권고를 내릴 것이라는 말로 기자회견을 마무리 했다.
잠시 후, 이 기자회견 내용은 네이버 뉴스 메인을 장식했다.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단면들에 대한 의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몇 시간 후, 다른 뉴스들과 마찬가지로 이 기사도 사라졌고, 한국사회에 대한 많은 이들의 부끄러움도 잠시 후 사라졌다. UN특보는 떠났고, 이주민들의 아우성만 남았다.
요즘에는 기자회견문을 조목조목 살펴보고 빠진 부분에 대해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내년 6월까지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서, 한국의 인종차별과 착취의 실태가 UN인권이사회에서 정식으로 채택될 권고에 빠짐없이 고스란히 실리기를 희망한다. 적어도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기록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좀 더 많은 사람이 부끄러워했으면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이들의 아우성이 줄어들지 않을까.
* UN인종차별철폐협약에 가입한 대한민국은 4년에 한번 정기적인 보고서를 UN에 재출하고 이를 검토 받는다. 이와 더불어 UN인권이사회에서 임명한 특별보고관은 일 년에 한두 차례 특별절차의 일환으로 조약 가입 국가를 직접 방문해 방문조사를 진행한다. 특보는 올해 방문조사지로 한국을 결정했다. 한 명의 특보가 전 세계를 관장하기 때문에, UN인종차별특별보고관의 한국 방문조사는 사실, 백년에 한 번 있을 정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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