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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학교, 도움 부탁합니다

아연대 2015. 6. 17. 16:01

 

우리 단체 해외활동 담당자는 지난 5월말~6월초 네팔을 방문하여 지진피해 상황을 살폈습니다.

현재 파트너 단체를 통해 하고 있는 활동을 점검하고

앞으로 복구와 재건을 위해 함께 할 활동을 정했습니다.

 

아래 소개하는 마야럭치미초중고등학교(고르카 타플레 소재)는 타플레 지역의 유일한 고등학교로

마을 주민 모두가 소중히 여기는, 역사가 60년이나 되는 학교입니다.

 

우리 단체는 SoD Nepal과 함께 이 학교의 임시교실 마련을 도왔고

이번 방문시에는 학용품과 응급약품을 지원했습니다.

 

앞으로 재건 노력을 함께 하기 위하여

이 학교의 라함 툴라 미아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학교운영위원회 위원들, 마을 주민들과 함께 협의하고 있음을 보고드리며,

다음과 같이 이 학교와 마을의 소식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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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되기전 새 학교 지었으면.....

무너진 학교, 도움 부탁합니다. 

 

큰 지진 두 번이 네팔에 남긴 상처는 크고 또 깊었다. 수백 년을 굳게 서 있던 고대 도시는 가뭇없이 무너져 내렸고, 산골마다 깃들어 살던 사람들은 죽고 상처 입은 채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산악지역인 고르카 타플레 마을은 지진 진앙지에서 가까워 어디 하나 성한 곳을 찾기 어려울 만큼 망가져 있었다. 차를 타고 카트만두에서 고르카 도심까지 다섯 시간, 다시 비포장 산길을 삼십분 가량 달리면 타플레 마을이 나타난다. 우리 행정단위로 치면 구(區) 쯤 되는 타플레에는 산속 골골이 자리 잡은 9개 동이 속해 있다. 각 동은 두세 시간은 족히 걸어야 가 닿을 만큼 멀찍이 떨어져 있다. 타플레 4동에는 마야럭치미초중고등학교가 있다.

 

초등학교 과정인 1-5학년, 중학교 과정인 6-8학년, 고등학교 과정인 9-10학년, 국제적으로는 고등학교 과정에 속하나 네팔에서는 단과대 정도의 개념으로 보는 11-12학년까지, 모두 650여명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터전이다. 타플레에서는 유일한 고등학교다.

 

 

 

 

 

 

 

 

 

 

 

언덕위에 들어선 학교는 넓은 부지를 마련하지 못하고

땅을 한뼘씩 얻는대로 건물을 앉히는 바람에

삐뚤빼뚤 들어선 건물 7채에  교실 20개가 들어있다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이 학교에는 건물 7채에 교실 20개가 앉아 있다. 삐뚤빼뚤 앉은 건물은 땅을 조금씩 얻을 때 마다 하나씩 늘려간 탓이리라. 7채 중 6채가 이번 지진으로 부서졌다. 학교 운동장에는 햇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양철건물이 일자로 길게 서 있다. 한국인들의 후원으로 지은 임시 교실이다.

 

한국인 불교성지 순례객을 대상으로 여행사를 운영하는 네팔인 어르준 파울델 씨와 인도인 너윈 신하 씨가 지진 이재민과 나눌 구호 식량을 들고 타플레를 찾았을 때, 이 학교의 교장 라함 툴라 미아(50세)는 이들의 손을 왈칵 잡아 학교로 이끌었다.

 

“식량으로 배를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은 마음과 머리를 지식으로 채워야 합니다. 교육청에서는 당장 학교 문을 열라는데 아이들을 깨진 벽돌 더미에 앉힐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오. 제발 이 학교를 도와주시오.”

 

 

얼결에 학교를 둘러본 두 사람은 깨지고 무너진 학교와 참담한 교장의 마음을 보았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계속되는 지진으로 흔들리고 있는 여물지 못한 땅에 다시 벽돌을 쌓을 수도 없고, 또 그럴 돈도 없었다. 필요한 교실이 한두 개도 아니고 무려 스무 개나 되지 않는가!

 

처음에는 천막을 칠까 생각도 했지만, 당장 우기가 시작되면 거친 비바람을 견뎌야 하니 천막으로는 가당치도 않았다. 거듭 회의를 거듭한 결과 우선 빈 운동장에 대나무로 기둥을 단단히 세우고 양철로 지붕과 벽을 둘러 임시 교실을 짓기로 했다. 공사비는 한국인들의 후원금으로 충당했고, 또 이 공사에는 한국인 생태건축가 강대건 씨가 참여했다. 비록 양철 임시 건물이지만 아이들을 위해 더 안전하고 튼튼하게 짓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학교선생님, 마을주민들과 함께 지은 임시교실

 

 

 

교실을 짓는 사나흘간 참여한 주민들은 연인원 600여명에 달했다. 낫 한 자루를 허리춤에 차고 오는 이들, 가느다란 줄톱이나 망치를 들고 오는 이들. 각자 되는 만큼 연장을 챙겨든 이들은 새벽부터 두세 시간을 걸어와 아이들을 위한 교실 공사에 참여해 땀을 흘렸다. 한국인 건축가에게 대나무를 깊고 단단하게 고정하는 방법, 맞배지붕을 얹는 방법을 배운 이들은 양철가옥 기술자로 대접받으며 주변 학교를 짓는데도 참여했다는 후문이다.

 

이렇게 세운 임시교실을 어루만지며 미아 교장은 목이 메었다. 그러나 공사에 애면글면 매달리느라 몸이 많이 상한 교장은 정작 개학날은 병원에 누워 소식만 들어야 했다.

 

 

 

벽돌 한 장이 아쉬워요

 

 

학교가 개학하던 6월 1일, 타플레 마을과 학교를 찾았던 우리는 결국 열혈교장선생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여러 날 지나 6월 4일,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 카트만두 큰 병원으로 옮겨온 미아교장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미아교장은 마침 며칠을 괴롭히던 고열이 가라앉았다며 학교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가 올해 60주년을 맞아요. 38년 전에는 저도 이 학교 학생이었죠. 그때는 커다란 나무 밑에 나뭇잎을 깔고 앉아 공부했는데, 그나마 3학년까지만 다닐 수 있었어요. 4학년부터는 두 시간 씩 걸어 다른 학교에 다녔죠. 그때 저는 우리 마을의 유일한 고등학생이었어요. 친구들은 가난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학교가 너무 머니 하나둘 공부를 포기하고 농사를 지었어요. 결국 저 혼자 남았죠. 저는 10학년에 다니고 있을 때 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신청해서 교사가 되었어요. 제 나이 열다섯 살 때입니다."

 

" 저는 제가 겪은 어려움을 아이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어요. 학교운영위원회와 같이 마을 주민들께 호소해서 땅을 조금씩 얻어 건물을 하나씩 짓고 운동장도 만들며 학교다운 학교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우리 학교는 공립학교지만 정부가 다 지은 게 아닙니다. 마을 주민들이 손바닥만큼씩 땅을 내놓고 돌 하나씩 나르며 거의 주민 땀으로 지은 거예요. 나중에 정부도 예산을 좀 내고, 외국인 후원자들도 힘을 보탰지만 가장 큰 힘은 주민에게 나온 거랍니다.

 

 

 

 

 

 

 

지진으로 인한  임시 휴교가 끝나고, 개학날 모여든 학생들

 

 

 

 

 

 

 

지금도 하루 한두차례 여진이 오지만

아랑곳없이!

 

크리켓을 하며 놀고 있는 꼬마녀석들^^

 

 

 

우리 마을은 유독 이슬람 인구가 많아요. 예전 고르카 왕국 때 공예기술자로 무슬림(이슬람교도)을 이주 정착시키면서 그리 된 것이죠. 저도 무슬림입니다. 무슬림인 제가 힌두인들의 학교에 다닐 때 처음에는 비아냥이 많았어요. 하지만 제가 교사가 되고 또 이 학교 교장이 되면서 무슬림들도 공교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했어요. 지금은 무슬림 여학생들도 우리 학교에 아주 많아요. 여자아이는 교육시키지 않는다는 이슬람 종래 관습을 누르고 모든 아이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어요. 또 카스트제도로 가장 차별받는 달리트(불가촉천민)들도 다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카스트제도는 워낙 뿌리가 깊어 공식적으로는 사라졌지만 우리 의식과 생활에 아직 그대로 남아있거든요. 적어도 우리 교문 안에서는 신분에 의한 어떤 차별도 없도록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원래 저는 올해 60주년 행사를 마치고 교직을 내려놓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 지진이 그 계획을 흔들어 놓네요. 저도 그냥 마무리하기 마음이 편치 않고 운영위원회에서도 학교를 새로 짓고 정상화될 때까지 맡아 달라고 요청해 왔어요. 저도 그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임시교실을 지어 당장 급한 교육은 재개했지만 갈 길은 참으로 멀다. 하지만 미아교장의 총총한 눈은 의지로 차 있다. 기력 없는 몸을 당장이라도 일으켜 금방 마을로 달려갈 태세다.

 

 

 

 

 

 

이 마을의 주택도 대부분 큰 피해를 입었다.

겉에서 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안에 들어가면 벽이 무너지고 천장이 내려앉아

도저히 생활이 불가능하다.

 

주민들은 집근처 공터에 천막을 치고 생활하며 농사일을 하고 있다.

 

 

 

 

 

원래 물이 귀한 산마을,

이번 지진은 주민들에게 생명과 같은 물을 내주던 샘물을 거의 다 막아 버렸다.

간신히 살아 있는 샘에서 물을 받고 있는 주민들

 

 

 

 

“한국인들 도움으로 임시교실을 지을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지진 이후로 건물 안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던 아이들이 새 교실에는 다람쥐처럼 드나들어요. 그걸 보면 새 교실 덕분에 아이들 마음속에 생겼던 지진 두려움이 점점 사라지고 있구나 싶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여진이 가라앉고 우기가 지나면 본격적으로 재건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정부도 그런 계획을 발표하고 있으나 워낙 힘이 없고 돈도 없는 나라라 그 약속만 믿고 기다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이미 많이 도와주셨지만 한번 더 요청드립니다. 정말 벽돌 한 장이 아쉬워요.”

 

 

 

 

 

 

과로로 일주일 넘도록 병원신세를 지고 있는 미아 교장 선생님,

병원에서도 내내 학교 생각만 하고 있다고

가족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

 

 

 

삶은 참으로 모질고도 얄궂다. 숱한 죽음과 상처를 딛고 산 사람은 또 살아간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배워야 하고 어른 된 자들은 아이들에게 그 터전을 마련해 주어야 마땅하다. 얇은 양철판이 한겨울 한기를 얼마나 막아줄까 모르겠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땅도 단단해 지고 새 학교 짓는 일도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른 된 자들이 외면하지 말고 이 책임을 잘 이어갈 수 있기를! 지진님도 이제 그만 오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