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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업은/링크업이모저모

젊은 숨이 멎고, 꿈도 멎었습니다

by 아연대 2010. 6. 4.
 

한국에서 사망한 노동자의 가족 중 열두 가족을,
지난 2006년 7월부터10월까지 찾아다니며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가족들 가슴에 담긴 애절한 이야기를 
<꿈 그리고 악몽>으로 엮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며 후원금이 모이기 시작하여,
지금 진행하고 있는 네팔장학사업의 종자돈이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마음을 보태고 계신 덕에 2010년 6월 현재 모두 24가족 50자녀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15년 전 세상 떠난 네팔 이주노동자 마덥 쿠워의 이야기


1992년 한 네팔 젊은이가 한국으로 일하러 왔습니다. 아직 '이주노동자'라는 말 자체가 낯설고, 한국과 네팔을 잇는 어떤 제도도 없었던 시절입니다.


그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싶은, 열심히 일해서 꿈을 이루고 싶은 평범하지만 진취적인 젊은이였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그에게 붙인 딱지는 '불법체류자', 심장이 멎을 만큼 힘들게 일했지만 갑작스런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마덥 쿠워입니다. 14년 전 다른 세상으로 떠난 그의 짧은 한국 생활을, 아버지를 통해 다시 들었습니다. 가려진 것이 너무 많고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아주 헛된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네팔 이주노동자 공동체는 그의 죽음 이후에 만들어졌습니다.


 

1992년, 낯설고도 먼 나라로 떠난 아들


너무 오래된 일입니다. 벌써 14년이나 지났으니. 하루하루가 지옥같고 이 세상을 어찌보낼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어느 새 그 녀석없이 우리는 14년을 살았네요. 참으로 지독하면서도 무심한 것이 세월이라더니.


지금도 많은 네팔 젊은이들이 한국에 가고 싶어하지요. 예전에 우리 마덥처럼 말이지요. 우리 아들도 그저 다른 젊은이들하고 비슷한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운명은 서로 다른가 봅니다.


14년 전에 우리 아들이 한국에 갔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노동자를 외국으로 보내는 공식 기관같은 게 없었어요. 브로커들이 한국에 갈 사람을 모집하고 다녔는데, 우리 아들이 거기다 돈을 주고 한국에 갔어요. 우리 마덥은 그때 대학생이었어요.


어느 날, 한국에 일하러 가고 싶다기에 깜짝 놀라서 말렸어요.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도 모르고 어디 붙어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어요. 인도나 영국이나 그런 나라는 많이들 갔지만, 한국은 우리가 잘 모르는 나라 아닙니까. 나보다도 아내가 더 말렸어요. 그런데 그 녀석이 어찌나 고집을 부리던지, 저 죽을지도 모르고. 그 때 더 말려서 못 가게 했어야 하는 거였는데…. 그때가 1992년, 평생 지울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해가 되었지요.


한국으로 떠난 지 3개월쯤 지났을 때였던가, 전화가 왔어요. 봉제 공장에서 일 했는데, 아직 월급을 받지 못했다고 걱정을 하데요. 그래서 뭐라고 할 말이 있어야죠. 좀 기다려 봐라 했는데 한 달쯤 지나서 또 전화가 왔어요. 돈을 받았는데, 이 돈이면 식구들 당분간은 걱정없이 지낼 수 있는데, 네팔로 돈을 보낼 방법이 없다고 안타까워했지요. 그 때는 한국에 가기도 힘들고 돈을 벌어도 보낼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언젠가 아들이 보내준 사진을 보니 처음 갈 때보다 많이 여위었더군요. 한 10kg은 빠진 것 같았어요. 힘들어서 그러냐는 말에 아들은 그저 음식이 잘 안 맞아서 그렇다고, 아직 한국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만 말했습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고 몰랐겠습니까. 자식들 떨리는 목소리만 들어도 속까지 알 수 있는 것이 부모인 것을….


마덥은 돈을 보낼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지만, 우리는 마덥이 그 돈을 벌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한없이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걱정을 떨치려고 애썼지요. 우리 아들은 동네 사람들도 모두 좋아하고 누구나 칭찬하는 좋은 아이였어요. 그렇게 착한 녀석에게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삶도 죽음도 힘겹고 막막한 '불법체류자'의 운명


우리가 마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마덥이 죽은 지 두 달이나 지나서였습니다. 마덥은 한국으로 간 지 5개월 만에 죽었고, 그 직후에 한국 정부가 네팔 외교부에 편지를 보내서 연락을 받은 경찰이 동사무소를 수색하다 연락처를 알아냈다고 했습니다. 마덥이 불법체류 상태만 아니었다면, 아니 불법체류를 했어도 함께 일하고 생활하던 사람들이 평소에 마덥에게 조금만 관심을 가져줬더라면 우리한테 소식이 그렇게 늦게 오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한국으로 간 지 7~8개월 정도 되었을까요. 여느 때처럼 일이 끝난 후 돌아와 빨래를 하러 갔고 그러는 도중에 넘어졌는데, 쓰러져서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희는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빼빼 말랐던 아들 사진이 자꾸 떠오릅니다. 한국이란 나라에서 돈 버느라고 얼마나 고생했으면 그리 말랐겠습니까. 심장마비라는데…, 아마 너무 고생하고, 너무 힘들어서 그랬던 게 아닌가 생각해요.


방법이 없었어요. 어디고 도와 달라고 얘기할 곳이 없었습니다. 네팔 사람에게도 한국 사람에게도 말입니다. 정말 우리 아들이 죽은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묻고 싶고 확인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두 달 넘게 차가운 냉동고 속에서 쓸쓸히 누워 있었을 아들이 한없이 불쌍해서 그냥 한국에서 장례를 치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리 아들은 부모도 없이 그렇게 한국에서 장례를 치렀어요. 나중에 우리 아들을 데려갔던 사람 손에 들려 뼛가루가 왔습니다.



재한 네팔인 모임의 결성으로 이어진 아들의 죽음


우리 마덥이 죽은 다음에 한국에 있는 네팔인들 사이에 모임이 생겼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있거나 힘들 때 네팔인들끼리 서로 돕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은 그렇게 죽었지만,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아들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보듬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은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착하게 살던 아들이 세상을 떠나며 남은 이들에게 큰 선물을 남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덥이 살아있다면 지금 서른 여덟 살입니다. 결혼도 했을테고, 자식도 두었겠지요. 몇 년 무사히 한국에서 돈을 벌어 왔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집에서 애들 크는거 보면서 잘 살았겠지요. 하지만 신께서 마덥에게 준 이 세상에서의 시간은 23년이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근심거리를 안고 삽니다. 지금 우리 막내 아들이 쿠웨이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정말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막내 아들만큼은 가난하고 힘들어도 함께 살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마덥을 말리지 못했던 것처럼 막내 아들 녀석도 말리지 못했습니다. 무능력하게도 저는 그런 아들에게 해 줄 게 없습니다. 그저 열심히 일하다 무사히 돌아오라고 기도할 뿐이지요.




 

네팔은... 

 


네팔은 히말라야 산맥 중앙부에 자리잡은 국가로, 북쪽으로는 죽국과 티벳, 남쪽으로는 인도와 접해 있으며 수도는 카투만두이다.


기본적으로 입헌군주제에 입각한 의회내각제를 실시하고 있으나 지난 10여년간 내전을 겪으면서 체제가 상당 부분 흔들리고 있으며, 2006년 민주화 시위 이후 새로운 정치 체제로의 변화가 모색되고 있다.


네팔은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인도·아리안계가 80%로 주류를 이루고, 몽골·티벳계가 17%이다. 이를 민족별로 세분하면 체트리 15.5%, 브라만힐 12.5%, 머거르 7%, 타망 5.5%, 네와르 5.4% 등이다.


종교는 힌두교 80.6%, 불교 10.7%, 이슬람교 4.2% 등으로 힌두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이로 인한 갈등은 거의 없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관광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산업발전이 더딘 편이며, 인구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평균 수명은 60.18년(남자 60.43년, 여자 59.91년)이고, 평균 결혼 연령은 20.3세(남자 20.1세, 여자 20.4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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